“부부간에도 강간죄 성립” 항소심 법원 첫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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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법률상 부부간에도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항소심(2심) 법원의 첫 법률적 판단이 나왔다. 앞서 2009년 1월 부산지법(1심)의 ‘부부간 강간죄 성립’ 판단 이후 2년8개월 만이다. 29일까지 피고인이 상고할 경우 이 사건은 대법원의 판단을 받게 된다. 대법원은 1970년 “법률상 부부 사이에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고 그 후 41년 동안 유사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간 적이 없었다.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 최상열)는 흉기로 찌르고 위협해 아내와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혐의(강간 등)로 기소된 A씨(40)에 대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고 25일 밝혔다. 재판부는 “형법에서는 강간죄의 대상을 ‘부녀’로 규정하고 있을 뿐 다른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며 “따라서 법률상 아내가 모든 경우에 당연히 강간죄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어 “부부 사이에 성관계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폭행·협박 등으로 반항을 억압해 강제로 성관계 할 권리까지 있다고 할 수는 없다”며 “A씨의 행위에는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설명했다. A씨는 지난 4월 술에 취한 채 아내와 다투다 흉기로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힌 뒤 더 때릴 것처럼 위협해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부부간 강간죄 성립’을 처음 인정한 건 부산지법 형사5부다. 이 재판부는 2009년 필리핀인 아내를 성폭행한 L씨(당시 42세)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었다.

당시 재판부는 “형법상 강간죄의 대상인 ‘부녀’에 ‘혼인 중인 부녀’가 제외된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법이 강간죄로 보호하려는 대상은 여성의 정조가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이며 아내 또한 이런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70년 대법원 판례를 처음으로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은 당시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는 설령 남편이 폭력으로 강제로 처를 간음했다 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부산지법 판결은 항소심 법원의 판단을 받지 못했다. 선고 4일 뒤 피고인이 자살해 공소기각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서울고법이 아내를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양모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적이 있지만 ‘부부간 강간죄’의 성립 여부가 항소 이유로 검토되지는 않았다. 양씨 측이 “부부간에는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뒤늦게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확정돼 대법원 판단을 받지 않았다.

구희령·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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