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Special] “마술사 이은결은 스스로 만들어진 존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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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술 같은 삶을 살아온 마술사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스스로 마술을 익혀 세계 정상급 마술사로 성장했다. 마술사 이은결(30). 열다섯 살에 마술을 시작했다. 이제 갓 서른 문턱에 올랐는데, 경력이 15년에 이른다. 생애 절반을 마술사로 살아온 셈이다.

 그는 “마술사 이은결은 스스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가 마술을 시작할 무렵,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 우리 마술계의 풍경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마술사’란 직함조차 어색하던 시절이었다. 대중은 마술을 서커스의 일종으로 여기곤 했다. 길게 치솟은 콧수염, 미인 도우미, 야바위…. 이런 것들이 마술과 들러붙어 있던 이미지였다.

글=정강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당시 소년 이은결은 궁금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 쇼에선 마술사들이 예술가로 대접받는데 왜 우리나라에선 안 되는 걸까.” 마술사 이은결의 삶은 이런 물음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2003년 10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매직 세미나에서 황금사자상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한국 마술계는 술렁였다. 마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새로운 마술사의 출현이었다.

 마술의 예술 가능성을 믿고 있는 그는 최근 후배 마술사들과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마술사 네댓 명이 동시에 무대에 오르는 매직 콘서트 ‘이스케이프’다. 마술사 개인의 공연으로만 여겨졌던 매직쇼를 한 편의 뮤지컬처럼 집단예술로 탈바꿈시켰다. 이은결은 이 공연의 총연출을 맡았다. 그가 자신의 매직쇼가 아니라 다른 마술사들의 공연 연출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 달 3일까지 서울 영등포 CGV 팝아트홀에서 펼쳐지는 이 콘서트엔 이런 타이틀이 붙었다. ‘마술 비법 대공개’. 가만, 마술의 비밀을 공개한다고? 그 비법이 뭐기에? 이달 중순 이은결이 중앙일보를 찾았다. 그와 마주 앉자마자 대뜸 물었다.

●비법부터 물어봅시다. 대체 어떤 비밀을 공개한다는 뜻인가요.

 “하하, 서두르지 마세요. 마술사의 뒷모습을 여러분께 공개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술에 숨겨진 비밀도 슬쩍 보여 드릴 거고요. 모두 한 편의 콘서트에 필요한 요소입니다. 거기까지만 말씀드리죠.”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마술의 비법이 공개되면 어딘가 시시해지는 것 아닌가요.

 “저는 더 이상 마술에 비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제가 방송에서 마술을 보여주면 포털 사이트 같은 곳에 그 마술의 원리에 대한 이야기가 죽 올라와요. 그게 맞든 틀리든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공개적으로 돌고 있는 이상 사람들이 더 이상 마술의 비법 자체를 궁금해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예요. 비밀이 깔려 있는 마술을 어떻게 활용해 무대에서 어떤 표현을 할 것인가. 그게 제 숙제죠.”

소년, 마술을 만나다


 이은결은 어려서부터 마술사에 매료됐다. 명절이면 TV에 나오는 해외 마술사들의 화려한 쇼에 푹 빠져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그는 결심했다. “마술사가 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야지.”결심은 했는데, 딱히 배울 데가 없었다. 당시 서울에 ‘에디슨 월드매직’이란 마술 아카데미가 있었다. 전국에서 유일한 마술 학원이었다. 3개월 코스로 마술을 가르쳐줬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기초 중에도 기초였는데도 그게 너무 신기해 3개월이 지난 뒤에도 학원을 떠나지 않고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게 그가 본격적으로 마술을 만나게 된 첫 순간이다. 그는 말한다. “당신이 태어나 처음으로 첫눈을 봤을 때의 추억을 떠올려 보라. 아니면 처음으로 산을 붉게 물들인 노을을. 그게 당신이 본 첫 번째 마술이다.”

●학원에서 배운 건 한계가 있었을 텐데요.

 “그렇죠. 에디슨 월드매직이란 학원이 유일한 곳이었지만 3개월 배우고 나니 더 배울 게 없었어요. 그래서 비디오 테이프를 구했어요. 해외에서 들어온 마술 강의 비디오였는데,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반복해 시청했어요. 비디오 영상이 제 스승이었던 셈이죠.”

●얼마나 열심히 봤기에 테이프가 늘어났을까요.

 “강의 테이프 말고도 ‘월드 그레이티스트 매직쇼’란 테이프가 있었어요. 시리즈로 5편까지 있었는데, 거기엔 해외에서 가장 유명한 마술사들의 쇼가 담겨 있었죠. 학교 갔다 오면 잘 때까지 쉬지 않고 비디오를 들여다봤어요. 어떨 때는 소리를 죽이고 마술사의 표정만 보기도 하고, 또 한번은 마술사들의 손짓만 보기도 하고. 뭐 그런 식으로 계속 비디오를 봤어요. 마술을 배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첫 무대가 기억나세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축제에서 마술을 선보였어요.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마술이라고 하면,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마술사는 입을 닫고 마술을 보이고 ‘짜잔’ 하면서 마술이 끝나는 식이었죠. 근데 제가 지겹도록 본 비디오에는 그런 마술은 없었어요. 마술이 하나의 스토리가 있어서 전체 쇼가 마치 한 편의 이야기처럼 흘러갔거든요. 첫 무대에서 그걸 시도했어요.

●이야기가 있는 마술?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예컨대 카드를 사라지게 한다고 하면, 이렇게 이야기를 붙이는 겁니다. ‘자, 여기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저런, 그 여인이 갑자기 떠나갔네요.’ 매듭 마술을 한다면, 매듭을 이동시키며 이렇게 말하죠. ‘묶여 있던 사랑이 변심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런 식으로 마술이 진행되면 사람들이 좀 더 몰입하게 되죠. 하나의 레퍼토리가 있는 마술이죠. 감히 말하건대, 그 이전에 한국에 없던 마술 형식이었습니다.”

‘마술 한류(韓流)’의 선구자

  ‘스타 마술사’란 꾸밈말은 이은결이란 이름 앞에 당연한 듯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가 마술사로 이름을 알리기까지엔 남모를 고생담이 많이 숨어 있다. 이렇다 할 스승이 없었던 그는 해외 유명 마술사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무작정 찾아가 “마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렇게 귀동냥으로 하나씩 기술을 늘려갔고, 직접 라스베이거스 쇼를 보면서 익힌 노하우를 꼼꼼히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 결과 2001년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세계 마술대회에서 수상했다.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 매직 콘테스트에서 1위를 한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미국마술사협회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1위에 오르고, 국제마술연합회 마술대전에서 종합 2위를 하는 등 해외에서 유명 마술사로 성장해갔다. 일종의 ‘마술 한류’ 선구자였던 셈이다.

●이은결씨 이전에는 마술대회에 나간 사람이 없었나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그런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10여 년 전만 해도 마술로 대회에 나간다는 생각 자체를 하기 힘든 환경이었어요.”

●어떤 계기로 출전하게 된 거죠.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코미디언 고(故) 김형곤씨가 운영하던 코미디클럽에서 공연을 했어요. 10분짜리 짧은 공연이었는데, 똑같은 마술은 지겨워서 이야기를 곁들인 마술을 시도했죠. 우연히 제 마술을 본 일본의 스타 마술사 유지 야스다 선생님이 대회에 참가해 보라고 권했어요. 대회를 앞두고선 두 달 동안 밥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마술 연습만 했어요.”

●세계대회 1등을 했으니 단번에 스타가 됐겠군요.

 “그게 그렇지 않았어요. 사실 한국에선 마술사가 세계대회에 나갔는지, 상을 받았는지 어땠는지 관심 있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방송에서 VJ도 하고 고정 코너도 맡으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송 경험을 통해 쇼를 어떻게 제작하는지 많이 익히게 됐죠.”

마술은 공감의 예술

 이은결이 후배 마술사들과 함께 꾸민 매직 콘서트 ‘이스케이프’는 국내에선 처음 시도되는 종합 마술 공연이다. 다음 달 3일까지 펼쳐지는 이 공연은 매회 500석 객석이 가득 찰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은결의 15년 노하우가 녹아 있는 연출에, 한설희·이훈·노병욱·조성진 등 신예 마술사들의 신선한 아이디어가 합쳐진 덕분이다. 특히 이 공연은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 흐름을 따라 흘러간다. 개별 마술사들이 하나의 캐릭터를 맡아 일종의 연기를 펼치는 식이다. 마술사의 연기 흐름을 따라 딱딱 맞아떨어지는 음악도 인상적이다. 이은결은 “마술사 여러 명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내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했다.

●후배 마술사들과의 공조가 돋보입니다.

 “이번 무대에 함께 오른 마술사들은 스터디 그룹에서 만난 사이예요. 이 친구들이 저한테 마술 노하우를 물어보러 자주 왔었거든요. 저는 후배에겐 무조건 퍼주는 스타일입니다. 제 마술의 근간을 흔들지 않는 한 다 가르쳐주죠.”

●후배 마술사들에게 강조하는 건 무엇입니까.

 “마술의 이론 체계를 세우라고 강조하는 편이에요. 무대에서 시도해 보는 여러 기술을 하나로 엮으면 이론을 정립할 수 있어요. 전체 마술을 관통하는 핵심 원리 같은 거죠. 그걸 간파하면 마술 쇼를 다양한 방법으로 연출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술의 기술 자체보다 존재하는 마술을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전달할까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마술은 대체 무엇입니까.

 “제게 마술이란 가능성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마술입니다. 마술엔 예술적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도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중입니다. 관객과의 공감은 그 가운데 핵심이죠. 마술은 공감의 예술입니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대입니다. 제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무대에 서야 저는 제가 가진 모든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가장 힘들 때, 기쁠 때, 슬플 때도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제겐 무대입니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곳도 무대입니다.”

j 칵테일 >> “마술 비법 여러분께 공개합니다”

이은결과 ‘이스케이프’에 출연한 후배 마술사들.


다음 달 3일까지 서울 영등포 CGV 팝아트홀에서 펼쳐지는 매직콘서트 ‘이스케이프’는 ‘마술 비법 대공개’를 내걸었다. ‘스타 마술사’ 이은결이 연출을 맡은 것만 해도 화제였는데, 비법까지 공개한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8일 오후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은 두 명의 MC가 번갈아 가며 진행을 맡는다. 이날 공연은 마술사 김민형이 진행했다. 이은결은 27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공연을 책임진다.

 가장 궁금한 대목은 역시 ‘비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비법 공개는 없었다. 대신 마술사의 뒷모습은 확실히 공개한다. 마술사 뒤편에서 펼쳐지는 이런저런 마술의 기본 기술을 관객에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조차 방심할 순 없다. 마술 기술을 공개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마술을 선보인다. 이은결은 “큰 틀에서 보면 마술사의 작업 프로세스에 대한 공개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실제 공연에선 아이디어 수집, 시뮬레이션, 연습 등 일곱 작업 단계를 따라 마술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대 청소를 하는 모습까지도 공연의 한 부분으로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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