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회의가 즐거운 세 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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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안에서는 회의라는 절차를 통해 구성원들이 소통하고 중요한 사안을 결정한다. 가족회의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부모가 가정 내 중대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온 가족이 모여 각자 의견을 말하고 결정을 내린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나 서로에게 바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가족회의를 하는 동안 일체감은 물론 설득하는 힘, 논리적으로 말하는 능력도 키울 수 있다.

글=박정현 기자
사진=최명헌 기자

탁경운씨 가족이 1년 넘게 매달 가족회의를 열 수 있는 비결은 회의 때 존댓말 하기와 역할 분담이다. [최명헌 기자]

탁경운씨 가족=“가족회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칭찬하기부터 하겠습니다.” 8일 오후 8시, 아빠 탁경운(44·서울 동대문구)씨의 사회로 9월 가족회의가 시작됐다. 둘째 민지(서울 답십리초 5)양이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간 친구 대신 청소를 했다며 자랑했다. 엄마 이주은(40)씨는 “이번 주에 맛있는 반찬을 많이 해줬잖아”라고 했다가 사회자로부터 “반말을 했다”며 지적을 받았다. 가족회의 때는 모두 존댓말을 하는 것이 기본원칙이다.

이어진 순서는 가족의 한 달 일정 공유하기다. 탁씨는 주말에 산행과 결혼식 참석, 큰딸 민형(서울 전일중 1)양은 중간고사 기간을 모두에게 알렸다. 가족 달력에 일정을 꼼꼼히 기록을 하던 이씨는 “각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알아도 서로를 배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가족회의를 처음 시작하는 가족들에게 이 방법을 적극 권했다.

이날 주요 안건은 민형양이 낸 ‘친구들과의 파자마 파티’다. 그는 집에서 친구들과 파자마 파티를 열겠다며 부모를 설득했다. 중간고사 스트레스를 풀고 추억도 만들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씨는 친구 부모들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탁씨 부부가 친구 부모들에게 직접 전화해 허락을 받기로 하고 이 안건은 마무리됐다.

탁씨 가족이 이처럼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가족회의를 한 지는 1년이 넘었다. 탁씨는 “큰딸이 사춘기를 겪는 걸 보면서 가정에서의 소통이 중요할 것 같아 시작했다”고 말했다. 3년 전쯤 비정기적으로 가족회의를 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가 많은 도움이 됐다. 당시 회의 도중 의견이 달라 부부싸움을 한 적도 있었다. 다시 가족회의를 시작하면서 가족이 찾은 해결 방법은 회의 때 존댓말 하기와 역할 분담. 존댓말을 하면 감정 조절을 할 수 있고, 역할을 맡아야 가족회의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빠는 사회자, 엄마는 일정 관리, 큰딸은 안건수집, 둘째 딸은 회의록을 맡았다.

주요 안건은 가족회의 일주일 전쯤 가족 온라인 카페에 올려 각자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회의에서는 학원에 다닐지 말지, 용돈을 얼마나 줄지까지 논의한다. 그러다 보면 1시간이 훌쩍 넘는다. 회의가 끝나면 그 날 내용을 카페에 올려 공유한다. 민지양은 “요구사항을 설득하다 보면 논리가 필요해 말하는 능력이 길러진다”고 말했다. 탁씨는“가족회의를 하지 않았다면 집안 일을 부모가 독단적으로 결정했을 것”이라며 “지금은 서로 설득하고 민주적으로 합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영수씨 가족=글씨를 또박또박 쓰던 지태우(서울 중화초 5)군의 글씨체가 지난해 갑자기 흐트러졌다. 고민을 하던 엄마 정진옥(37·서울 중랑구)씨는 남편 지영수(41)씨에게 도움을 청해 지난해 초 가족회의를 처음 열었다. 지씨는 “자녀에게 문제가 생겨 엄마 혼자 해결하기 어려울 때는 가족회의에서 머리를 맞대볼 것”을 권했다. 가족회의의 첫번째 안건이었던 태우군의 글씨체 바로잡기는 태우군에게 일방적으로 고칠 것을 강요하기보다 부모가 먼저 솔선수범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들 가족은 포스트잇 떼기 게임을 가족회의에 활용했다. 각자에게 고쳤으면 하고 바라는 한 가지를 포스트잇 4장에 각각 써서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붙인다. 예컨대 엄마는 주방, 아이들은 공부방 책상 위에 붙여 두고 계속 상기했다. 아빠는 담배 끊기, 엄마는 짜증내지 않기, 태우군은 정자(正字)로 글씨 쓰기, 딸 혜민(중화초 1)양은 존댓말 하기를 포스트잇에 썼다.

일주일마다 가족회의를 열어 한 주간 잘 지켰는지 서로 평가를 한다. 예전보다 좋아졌거나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 모두 인정을 하면 포스트잇을 한 장씩 뗀다. 한 달 뒤 가장 먼저 4장을 뗀 사람에게는 선물을, 남은 사람에게는 벌칙을 준다. 정씨는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로 했으면 게임처럼 즐기게 해야 아이들도 재미있게 따른다”고 설명했다. 선물은 놀이공원 가기나 가족여행처럼 평소 하고 싶었던 것으로 정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용돈을 깎는다. 지씨는 “습관이 들려면 적어도 한 달가량이 걸린다”며 “한 번에 여러 가지를 고치려고 욕심 내지 말고 한달에 한 가지만 목표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회의라고 해서 형식·장소·시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는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말하거나 가족이 대화하는 날로 생각하면 부담 없이 시도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장진식씨 가족=장유성(충남 탕정초 5)군 가족은 엄마 최향숙(39·충남 아산시)씨의 권유로 지난 2월부터 매주 일요일 밤 가족회의를 연다. 최씨가 책에서 가족회의에 관한 내용을 읽은 후 매력을 느껴 제안했다. 당시 유성군의 식사 태도가 좋지 않아 이를 회의의 첫번째 주제로 정했다. 유성군에게 자세를 고칠 수 있을지를 묻고, 어떻게 고칠 것인지 스스로 방법을 찾게 했다. 부모가 방법을 강요하지 않자 아이는 신나서 자기만의 규칙을 정했다. A4용지에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써서 식탁에 붙였다. 결정 내용 중 하나인 ‘바른 자세 하자 하자’라는 구호를 식사 때마다 외쳤다. 아빠 장진식(39)씨는 “가족회의에서 문제 해결 방법을 아이 스스로 찾도록 하니까 자발적으로 실천했다”고 말했다.

가족회의 주제는 주로 생활 태도에 관한 것이다. 장씨는 아내의 불만을 받아들여 자정 전에 취침하기, 최씨는 아이들과 남편의 의견을 반영해 사소한 일에 화내지 않기, 유성군은 어른이 부르면 한 번에 대답하기, 우정(탕정초 2)양은 투정 부리지 않기를 목표로 정했다. 아침 식사 다같이 하기를 결정하고 못 지키면 찬물로 세수하는 벌칙도 만들었다. 오전 7시에 일어나야 해 아이들이 힘들어 하면서도 곧잘 지켰다.

장씨는 “가족회의 주제가 주로 기본적인 생활습관 바로잡기여서 고치고 나면 느끼는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유성군은 “평소 엄마·아빠에게 혼이 날까 봐 하지 못한 이야기를 회의에서 편하게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장씨는 “아이들의 숙제가 많거나 시험 기간일 때는 회의를 하기가 쉽지 않다”며 “그래도 미루지 말고 일주일에 30분이라도 해야 가족회의를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가족회의에서 나온 안건과 계획서는 가족 모두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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