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총리’ 낙인찍힌 베를루스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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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5) 이탈리아 총리가 19일 오전 10시(현지시간) 밀라노 법정에 출두했다. 변호사에게 돈을 주고 위증을 유도한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법정 밖에 모인 취재기자들과 시민들을 향해 활짝 웃었다. 한 기자가 소감을 묻자 “나 말인가? 아주 좋다. 표정이 좋지 않은 쪽은 그쪽(기자·시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순간 여기저기서 “물러나라, 물러나라!”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항의였다.

 그리고 한나절 정도 흘렀다. 미국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이탈리아 장·단기 신용등급을 강등했다. S&P는 “중도우파 정부가 재정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작아 보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베를루스코니가 무능하다고 낙인찍은 셈이다.

 실제 베를루스코니는 재정위기 전염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했다. 긴축과 세금 인상 결정을 놓고 우왕좌왕했다. 국채 값이 떨어지는 등 시장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세수 목표 달성을 위해 부가가치세율을 현행 20%에서 21%로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또 연간소득 50만 유로 이상 부유층에 소득세 3%를 추가로 물리기로 했다. 여성 퇴직 연령을 늦춰 연금을 받는 시기를 연기하는 방안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베를루스코니의 대표적 반대세력인 노동계가 연금 지급 연기에 반발했다. 이탈리아 최대 노동조합인 노동총동맹(CGIL)이 총파업을 하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섹스 스캔들도 불거졌다. 베를루스코니가 기업인 잠폴로 타란티니와 주고받은 적나라한 통화 내용이 공개됐다. 타란타니는 베를루스코니에게 성매매를 알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 통화 내용 중엔 2009년 1월 베를루스코니가 “어젯밤 11명이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8명하고만 했지”라고 말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베를루스코니의 운신 폭은 자꾸 줄어들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이탈리아 부유층과 재계가 소득세 인상과 규제 강화에 반대하고 나섰다”고 보도했다. 또 “연립정부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온갖 추문에도 묵묵히 지지해준 세력이 등을 돌리려 하고 내분 기운마저 느껴진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최근 사설에서 “정치적 무능과 비효율은 이탈리아의 일상이지만 재정위기가 전염되는 와중에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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