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대북정책 원칙’에 숨겨진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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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강영진
논설위원

류우익 신임 통일부 장관의 취임으로 정부의 대북정책 변화가 주목된다. 류 장관은 장관 내정 직후부터 ‘원칙과 유연성’을 화두(話頭)로 삼고 있다. 사실 ‘원칙과 유연성’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 초부터 대북정책에서 내세웠던 화두였다. 그러나 최근까지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유연성보다는 원칙에 치우쳤던 것이 사실이기에 류 장관이 새삼 ‘원칙과 유연성’을 강조하면서 원칙보다는 유연성에 무게가 실리는 것으로 세간에선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류 장관이 “유연성을 발휘하겠다”고 강조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 세간에선 온갖 추측이 무성하다. 이미 남북 간에 정상회담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 중이고 이르면 연내에도 성사가 가능하다는 소문도 돈다. 류 장관 본인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정상회담을 추진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연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것일까.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면 그 과정에서 원칙은 무엇이고 유연성은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 설마 또 정상회담에 상식을 벗어나는 대가가 뒤따르는 건 아닐까.

 현 정부가 강조해온 대북정책의 원칙은 지난 정부의 ‘햇볕정책’을 이어받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론 북한의 직접적인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 일방적 지원은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정책과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라면 압박도 불사한다는 적극적 정책을 병행하겠다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햇볕을 쪼이면 옷을 벗을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발상이며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옷을 벗게 하겠다는 투지(鬪志)를 과시한 셈이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너무 나갔다는 느낌이다. 대북정책에서 원칙으로 삼을 만한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 없이 무작정 내지른 것 아니냐는 말이다. ‘원칙(原則)’이라는 말의 뜻풀이는 ‘여러 사물이나 일반 현상에 두루 적용되는 법칙’이다. ‘두루 적용’되기 위해선 상황이나 시대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기준이어야 한다. 따라서 ‘햇볕정책’이나 ‘압박정책’이나 대북정책의 원칙으로 삼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햇볕정책도 압박정책도 북한이라는 상대에 의해 정책의 성패가 결정되기 쉽다는 데 있다. 특히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 우리 형편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북한을 변화시킨다는 목표를 포기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북한의 변화에 너무 매달리면 목표는 오히려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지난 10여 년간 우리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대북정책에서 원칙으로 삼을 만한 기준은 어떤 것일까. ‘북한의 안보 위협을 최소화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통일을 지향한다’는 정도가 아닐까. 여기엔 햇볕정책의 ‘장밋빛 전망’이나 압박정책의 ‘비장한 투지’도 담겨 있지 않다. 이 기준을 넘지 않는 선에서 북한과 대화도 하고 교류도 하며 지원도 하는 한편 필요할 때는 단호한 군사적 맞대응도 해나가는 것이 우리가 펼 수 있는 대북정책의 한계라고나 할까. 굳이 유연성을 발휘한다고 말하지 않고도 상황에 맞춰 모든 것을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 정상회담을 추진할지를 고민하지 말고 여론조사라도 하면 어떤가.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 없인 정상회담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다수라면 안 하면 그뿐이다.

강영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