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글로벌 금융시장 천동설이 바뀌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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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장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을 신청한 지 정확히 3년이 지났다. 아직 세계경제의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금융위기가 재정위기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미국 신용등급 하락과 유럽 재정위기가 세계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격랑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출렁이는 파도보다 저 깊숙한 곳에서 꿈틀대는 조류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글로벌 금융시장 기저에 흐르는 변화를 읽지 못하면 어떤 국가도, 금융회사도, 기업도 살아남기 힘들다.

 지난 3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무엇인가. 무위험자산(risk-free asset)이 없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그동안 무위험자산으로 인식된 것은 미국 국채였다. 천동설이 지배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미 국채는 시장의 중심인 지구였다. 두 번에 걸친 양적완화와 신용등급 하락으로 시장의 인식이 변했다. 미 국채는 절대 안전하다는 금융시장 천동설이 흔들리고 있다. 물론 지금도 미 국채는 위험이 가장 낮은 금융자산이다. 가장 위험이 낮긴 하되 무위험자산은 아니라는 생각이 시장에 팽배해 있다.

무위험자산이 없다는 말은 금융시장에서 기준이 되는 무위험 이자율이 없단 말이다.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에서 방향을 인도해줄 등대가 없어진 것과 같다. 글로벌 시장에서 패러다임이 바뀔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제일 먼저 바뀌는 것은 금융자산 가격 결정 모델이다. 가격이 바뀌면 모든 게 바뀐다. 가격이 자원 배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가격 결정 방식은 무위험이자율에 특정 자산의 위험프리미엄을 더하는 것이다. 바로 자본자산가격결정모형(CAPM)의 기본 아이디어다. 해리 마코위츠와 윌리엄 샤프는 이 모델로 199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미 국채 외에 무위험자산으로 사용될 수 있는 대안은 없을까. 최근 안전자산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 스위스 프랑이다. 그렇다면 스위스 국채가 무위험자산으로 사용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준이 되기엔 스위스 경제 규모가 너무 작다. 군사적·외교적 힘 또한 고려치 않을 수 없다. 혹자는 금(金)을 말하기도 한다. 이 또한 아니다. 반세기 전에 금본위제도를 포기한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금은 그 생산량이 제한돼 있다. 과거에도 세계 무역거래를 뒷받침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어림없다. 안전자산으론 좋은데 무위험 기준금리로 사용되기 힘들다는 뜻이다. 최근 새로운 대안이 급부상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재정위기 이후 바뀐 것 중의 하나가 국가는 절대 부도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국가가 기업보다 안전하다는 생각도 바뀌고 있다. 미국의 경우 70개 정도 기업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미 국채 프리미엄보다 낮다. 엑손 모빌과 마이크로소프트, 존슨 앤드 존슨 등은 신용등급이 미 국채보다 높다. 사정이 이러하니 초우량 기업들을 무위험자산 대용물로 쓰자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보면 서브프라임 위기 후 국가의 힘이 커졌다는 생각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논의는 많지만 미 국채를 대체할 무위험이자율을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대안들이 모색되고 있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가 있다. 가격 결정 방식을 다양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화되고 분산돼야 할 것은 투자 대상, 비즈니스 모델만이 아니다. 모든 국가와 모든 금융회사, 모든 기관투자가가 동일한 가격 결정 모형을 사용한다면 이 또한 시스템 리스크를 높이는 쏠림현상이다. 어찌 보면 무위험자산을 바꾸는 것은 변화이되 부드러운 변화다. 더 파격적인 변화는 아예 무위험자산이 없는 세상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선 무위험자산 없이 자산가격을 결정하고 투자 결정을 해야 한다. 미 국채도 위험자산이고, 따라서 다른 자산들과 본질적 차이가 없다. 미 국채 중심 글로벌시장 천동설도 바뀔 수밖에 없다.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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