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스페셜 - 화요칸중궈(看中國)] 한자, 전쟁의 언어 … 군사성어 7500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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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진시황을 호위하기 위해 만들어 그 무덤 인근에 묻었다는 병마용의 모습-. 다가서는 적을 향해 언제라도 공격하려는 듯한 분위기가 이들의 표정에서 묻어난다. 당시 청동과 철로 만들어 이들 손에 쥐어졌던 무기는 부식돼 대부분 사라졌으나 흙으로 만들어진 토용의 표정과 갑옷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중앙포토]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 천군만마(千軍萬馬), 모순(矛盾), 오합지졸(烏合之卒)….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자(漢字) 성어(成語)들이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구사하면 언어의 뜻이 풍부해져 예나 지금이나 꾸준하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활용되고 있는 말들이다. 앞에 예시한 성어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오십보소백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쉰 걸음 도망친 사람이 백 걸음 도망친 사람을 꾸짖는다는 얘기다. 천군만마는 대단한 규모의 병력을 일컫는다. 모순의 원래 뜻은 ‘창과 방패’다. 그러나 논리나 이치가 서로 어긋나는 상황을 말한다. 오합지졸은 규율 없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든 무리를 말한다. 

이들 성어의 공통점은 모두 ‘전쟁’ 또는 그에 준하는 상황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오십보소백보의 장면은 전쟁터다. 적군의 공격에 밀려 도망쳤던 두 남자의 얘기다. 조금 도망친 사람이 저보다 좀 멀리 도망친 사람을 꾸짖고 있다. 천군만마 또한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족보’ 있는 말이다. 모순과 오합지졸 역시 『한비자(韓非子)』와 『관자(管子)』에 등장하는 성어다.

 성어라는 존재는 각 문화권의 언어 습관 속에 대부분 들어 있다. 그러나 보통 네 글자로 이뤄진 중국의 성어는 다른 문화권에 비해 훨씬 내용이 풍부하고 다양하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외치면서 그 토대로 내세운 ‘실사구시(實事求是)’처럼 중국의 성어는 현대 중국인의 언어 세계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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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한자 문화권에 있어 그 뜻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한국인들은 적지 않은 성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전편에서 얘기한 내용처럼 우리가 중국의 무술 영화를 보면서도 정작 ‘왜 중국인들은 무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지 않았듯이 우리는 중국의 성어를 활용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인문적 환경에 대해서는 둔감한 편이다.

 중국의 성어는 그 갈래가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그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게 전쟁과 싸움을 다루고 있는 군사(軍事) 성격의 성어다. 1996년 중국의 한 출판사가 펴낸 『군사성어(軍事成語)』가 수록한 군사 관련 성어는 모두 7500개다.

 중국의 성어는 중국인의 의식의 뿌리를 살필 수 있는 살아 있는 화석(化石)이다. 역사적인 배경을 담고 있는 성어의 정확한 수는 분명치 않다. 보통 성어라고 간주되는 것은 약 3만 개다. 군사적 성격의 성어가 큰 흐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직접 군사나 전쟁을 다루지 않더라도 혼란과 위기의 국면에서 자신을 보존하려는 성격의 성어도 많다.

 따라서 경쟁과 다툼 속에서 나를 지키려는 성격의 성어를 합치면 포괄적인 성격의 군사 성어는 훨씬 많아진다. 중국 성어 세계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성어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새옹지마(塞翁之馬)다.

 이 성어의 내용은 제법 친숙하다. 변방 요새에 사는 늙은이가 말을 잃어버려 비탄에 빠졌다가, 잃어버린 말이 다른 말 한 마리를 끌고 와 기뻐하는 장면. 이어 아들이 새로 얻은 말을 타다가 다리가 부러져 슬퍼했으나, 결국 전쟁이 벌어져 그 아들이 군대에 끌려가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세상만사 돌고 도는 것이라는, 그래서 순간의 상황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자는 중국인의 대표적인 처세훈(處世訓)이다. 직접 전쟁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 사람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성어다.

 중국의 외교 전략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도광양회(韜光養晦)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드러내지 말라는 뜻의 성어다. 요즘은 그동안 감췄던 경제적·군사적 실력이 드러나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G2의 시대를 열어젖힌 중국이다. 역시 군사적인 용어인 성세(聲勢)를 한껏 드러낼 모양새다. 그런 중국인의 언어 의식세계, 성어 속에 감춰진 전쟁의 그림자는 아주 짙고 길다. 참고로 아래에 그런 성격의 중국 한자 성어들을 적는다.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말들만 우선 골랐다.

 동쪽을 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서쪽을 공격한다는 성동격서(聲東擊西), 적에게 모두 포위돼 고립된 상황을 일컫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입은 꿀을 바른 것처럼 부드럽지만 속에는 칼을 감췄다는 구밀복검(口蜜腹劍), 강물을 뒤로 하고 싸운다는 배수진(背水陣),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백전백승(百戰百勝), 적의 틈새를 쳐서 빨리 승부를 가른다는 속전속결(速戰速決), 군대의 조직 각 부분을 치밀하게 연결한다는 수미상응(首尾相應), 상대의 내분을 지켜보다 기회를 잡자는 격안관화(隔岸觀火),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있다는 소리장도(笑裏藏刀), 대나무를 쪼개고 들어가는 듯이 공격하라는 파죽지세(破竹之勢), 적의 공격에 무참하게 물러서는 일패도지(一敗塗地)….

 한반도의 인문적인 풍토에서는 잘 쓰지 않아 우리에게 덜 알려진 군사 성격의 중국 성어는 훨씬 많다. 우리는 그런 성어에 담긴 중국인의 의식을 이해하는 게 마땅하다. G2 시대 세계 최강의 자리를 넘보는 중국과 매끄러운 우호관계를 꾸려가기 위해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저러나, 중국은 자신의 전통에서 우러난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과 준비의식으로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있다. 그 자신의 성어대로 ‘나라가 부강해지면 그 군대도 강해진다’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가르침을 꾸준하게 실천하고 있다. 그마저 넘어서 승리의 기운을 타고 더 깊숙이 들어가는 승승장구(乘勝長驅)의 결과를 올려 마침내 미국을 꺾고 천하무적(天下無敵)의 경계에까지 나설지 두고 볼 일이다.

 꾸준하면서 집요할 정도로 하드 파워(Hard power)를 쌓아 올렸지만, 중국은 그 긴장의 줄을 놓지 않고 있다. 이른바 안정 속에서도 위기를 생각한다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사고가 저들의 문화 유전형질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국방력 확장과 세계 최고의 외환보유액을 기록하면서 국가의 총체적인 역량을 더 높이 쌓기에 혈안이다.

 중국 대륙에 바짝 붙어 있는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은 어떨까.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지지 않는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의 교훈을 되새길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작은 성공에 만족해 ‘교만한 군대는 반드시 진다’는 교병필패(驕兵必敗)의 수렁에 빠질지 스스로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유광종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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