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블랙아웃] “현실 못 따라간 수십년 전 매뉴얼 … 실전 적용 불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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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정전 사태가 발생한 다음 날인 16일 오후 서울 삼성동 전력거래소에서 한 직원이 전력사용 현황을 살펴보고 있다. [변선구 기자]

한국전력이 만든 ‘전력 수급 비상 상황 매뉴얼’은 실제 비상 상황에선 통하지 않는 ‘탁상용’이었다. 주요 골격이 수십 년 전에 만들어져 바뀐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익대 전자전기공학부 전영환 교수는 “한마디로 매뉴얼이 적용될 수 없는 현실”이라며 “아직까지 한번도 이런 수급 비상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이런 매뉴얼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15일 오후 3시30분쯤. 대전 둔산경찰서 관내에 불이 꺼졌다. 순환 정전 명령 때문이다. 경찰서뿐만이 아니다. 경찰서 앞 네거리 신호등까지 불이 나갔다. 전국 400여 곳의 은행 지점이나 병원·시청·소방서 같은 기간시설도 예외가 없었다. 정전이 되면 큰 혼란이 빚어지는 이들 기간시설은 한전 ‘전기 차단 매뉴얼’상 차단 제외 대상으로 지정돼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선로 상황상 선별적으로 특정 시설만 전원을 차단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하나의 전기 선로는 적게는 100여 가구, 많게는 4000~5000가구에 전기를 공급한다. 한 선로에 포함된 시설인 이상 따로 전기를 차단할 수 없다. 그래서 주택가 전기를 끊으면 일대의 병원·관공서·은행도 다 전기가 끊기는 것이다. 전기 차단 순서를 정해놓은 매뉴얼 자체가 무용지물인 셈이다.

 비상 상황에서 예비 전력량에 따라 ▶발전기 추가 가동 ▶발전기 복구 가동 등의 조치를 단계별로 취하게끔 해 놓은 매뉴얼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처럼 전기 소비량이 수직으로 치솟는 상황에선 몇 분 또는 몇 초 안에 예비 전력이 바닥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원대 에너지IT학과 김창섭 교수는 “ 지식경제부 보고를 하느라 순환정전을 미뤘다간 전국적 정전 사태를 불렀을 수 있다”며 “신속하게 순환정전 지시를 내린 전력거래소의 결단이 오히려 맞다”고 주장했다.

 매뉴얼엔 전기를 차단할 땐 시설 특성에 따라 짧게는 1~2시간 전에, 길게는 하루 전에 예고하도록 돼 있지만 누가 어떤 방식으로 예고해야 하는지는 없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도 16일 국회 상임위에 출석해 “(정전 사실을) 방송사에 알리는 문제는 매뉴얼에 명쾌하게 안 돼 있다”고 말했다.

 전력거래소 염명찬 이사장도 16일 기자간담회에서 “ 민간 주택의 전기를 먼저 차단하도록 한 지금의 매뉴얼은 옛날 식”이라고 말했다.

글=임미진·허진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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