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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중도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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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

중도·중용의 정신은 과불급(過不及)과 편중(偏重)을 피하는 데 있다. 중도·중용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교차점이다. 중도·중용은 유교·불교가 숭상하는 가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발화한 중용의 관념을 기독교 윤리와 조화시키려고 했다.

 개인 윤리의 덕목인 중도·중용을 사회·경제 체제로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동양인은 태생적으로 사고방식이 중용·중도주의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동양에서 아직까지 중용·중도주의는 권위주의와 가까웠다. 서구 정치세계에서도 중도·중용이 구현됐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결국 수렴한다는 수렴이론(convergence theory)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수렴한 결과인 사회민주주의를 이념적인 중도·중용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런 주장을 펴는 이들은 역사에 이념적 종말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라고 믿는다.

 세계 도처에서 중도주의는 시련을 겪고 있다. ‘안철수 돌풍’은 현 정부 중도주의의 부정적인 평가를 의미한다. 미국에선 우파 극단주의가 힘을 얻고 있다. 사회 윤리나 경제 정책의 면에서 강경 보수의 입장이 득세하고 있다. 14개월 남은 미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내 예선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순혈 공화당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중도 우파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하게 됐다. 아직 유력 공화당 대선주자이긴 하지만 밋 롬니 매사추세츠 전 주지사의 과거 중도주의 행보가 그를 향한 공격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제1의 길, 제2의 길이 튼튼해야 제3의 길인 중도주의도 힘을 얻는다. 제1, 2의 길은 미국을 비롯해 세계 도처에서 아이디어 고갈의 위기를 겪고 있다. 미국 민주당·공화당이 내놓는 일자리 만들기 정책은 나오기가 무섭게 상대편으로부터 ‘이미 실패한 정책을 리사이클한 것’이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 민주당·공화당 중 한쪽은 맞고 다른 쪽이 틀린다면 다행이다. 문제는 양쪽 다 틀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현 단계 미국의 극단주의는 화려한 과거의 향수에 기대는 복고주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용기라는 중용은 무모함·비겁함 사이에 있다. 용기처럼 쉽게 딱 떨어지는 사례는 많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중용』이나 불경에 따르면 중용·중도는 극소수만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관조적(觀照的) 삶을 사는 사람이나, 해탈한 사람은 극소수다.

 개인 윤리 차원과 마찬가지로 사회경제 체제상의 중용·중도를 발견하는 것도, 실천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늘날 정치적 중도의 위기는 중도를 발견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발견한 중도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일까. 중도를 구현하려면 중도를 찾겠다는 의지와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모두 중요하다. 강한 의지가 결여된 어중간한 중도주의의 결과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속담처럼 된다.

 과연 중도가 존재하는지 중도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경청할 만한 것은 ‘애초에 중도란 없다’는 주장이다. 중도는 좌파나 우파가 상대편의 아이디어를 ‘훔칠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 좌파건 우파건 실천해야 할 고유의 어젠다가 차고 넘칠 때 굳이 남의 구상을 차용할 필요가 없다. 진짜로 상대편 어젠다를 훔쳐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면 중도주의는 공허한 것이 된다.

 만약 중도가 애초에 없는 것이라면 좌우의 극단이 더더욱 필요하다. 파산한 것은 중도가 아니라 좌우 이념일 수 있다. 자신 있는 좌파·우파는 극단주의자들이다. 중도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 중에는 중도주의가 성공하려면 ‘극단적인 중도주의’가 돼야 한다고 주문하는 이들이 있다. 그만큼 극단주의에는 힘이 있다. 여기서 물론 극단주의는 독재와 폭력은 철저히 배제한 이념적인 순수성을 말한다.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에는 극단주의자가 많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은 국가도 그런지 모른다. 잘 굴러가는 극단주의는 그것이 극단주의라는 것을 못 느끼게 한다.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