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R의 공포’ … 글로벌 채권값 연일 치솟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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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한국을 포함해 세계 각국의 채권가격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의 공포가 되살아나고 글로벌 경기 둔화의 우려가 각종 지표로 확인되자 안전한 자산의 대명사인 채권으로 돈이 몰린 결과다. 채권값은 당분간 더 오르거나(금리 하락) 현재 수준을 맴돌지언정 내려갈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6일 금융투자협회가 고시한 국고채 10년물 금리는 3.63%, 20년물 금리는 3.72%를 각각 기록했다. 이날 국고채 금리는 최근 급락의 여파로 매물이 늘어났지만 사자는 수요가 계속 왕성해 보합선을 지켰다. 이들 금리 모두 국내 채권시장 사상 최저치다. 국고채 3년물 역시 6일 3.35%까지 떨어졌다.

 이처럼 장기 국채가격이 뛰고 있는 것은 채권 이외에 이렇다 할 투자처를 찾지 못한 국내외 투자자들이 매집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채권 공급은 늘지 않아 물량 품귀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국내 기관투자가와 외국인들은 경기 침체 우려로 주식 매수를 미루며 채권 투자에 열중하는 양상이다. 국민은행 이창배 트레이딩부 팀장은 “짧은 시간에 장기채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미리 팔아둔 것을 되사자는 수요와 대기 매수세가 몰렸다”고 말했다. 외국인은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 기초체력이 좋고, 상대적으로 재정 건전성도 높아 채권 매수를 늘리고 있다는 설명이다.

 만기가 긴 채권 값이 갑자기 오르면서 금리의 장단기 역전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만기가 짧은 채권의 금리가 만기가 긴 채권의 금리보다 낮아야 정상이지만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일 기준 국고채 5년물은 통안채 2년물보다 0.03%포인트 낮아졌고, 국고채 3년물은 국고채 1년물을 0.02%포인트 밑돌았다. 모두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2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은 전형적인 경기 둔화 신호로 해석된다. 신동준 동부증권 투자전략본부장은 “투자자들은 경기가 나빠지면 금리가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미리 장기고정금리를 확정해놓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장기채권 가격의 기록적인 상승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가 1.98%를 기록했다. 1960년 이후 50여 년 만의 최저치였다. 영국 국채 10년물 금리도 110여 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인 2% 후반을 오갔다. 독일의 10년물 국채(분트) 금리 역시 사상 최저인 1.84%까지 떨어졌다. 약 200년 만이다. 분트는 유로존의 대표적인 안전자산이다.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균형재정에 가깝고, 국가신용등급도 ‘AAA’로 매우 안정적이다.

 신한금융투자 윤영환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지금 세계적으로 채권시장은 경기의 장기침체에 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값이 치솟는 것과 같은 이치다. 투자자들은 위험자산을 싫어하고 안전자산으로만 모이는 반면, 기업 등 자금 수요자는 이렇다 할 투자 계획이 없어 단기 운영자금만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흐름은 당분간 더 이어질 전망이다. 앞으로 유럽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해외 중앙은행들은 기준금리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8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어떤 경기 부양책을 내놓을지 등을 기다리고 있지만 큰 흐름이 바뀌기는 어려워 보인다.

김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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