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의 ‘골프 비빔밥’ <29> 라운드 뒤엔 언짢은 분들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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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일러스트=강일구

필드에 나간다 생각하면 좋다. 그냥 좋다. 전날 밤 골프 가방을 싸는 순간도 좋고, 골프장 가는 길도 마냥 좋다. 골프를 치고 난 결과에 간혹 실망하기도 하지만 골프장에 이르기까지의 기분은 마치 소풍을 가는 듯하다. 기분이 살짝 들뜨면서 어제와는 다르리라는 묘한 희망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어렴풋한 기대로 입가에 미소가 흐른다.

비즈니스로 어려운 상대와 함께해야 하는 골프라거나 천적에 가까운 라이벌과의 라운드가 아니라면 골프장 가는 길은 그 자체로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생각해 보자. 일상의 어떤 일이 우리를 그렇게 기쁘게 해주고, 신선한 자극을 주는지 말이다. 많을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약간의 엔도르핀이 돌면서 행복감에 젖게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골퍼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대개 거기까지다.

그 다음 장면부터가 문제다. 부푼 기대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기까지는 그리 여러 개의 홀이 필요하지 않다. 골퍼를 대상으로 골프를 마치고 난 다음의 마음 상태를 조사해 보면 90%에 가까운 사람들이 불행해하거나 실망감을 느낀다고 답한다. 더욱 심하게는 좌절감 또는 분노를 느낀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없는 시간을 쪼개고 녹록하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치른 그날의 이벤트가 왜 늘 그 모양 그 꼴인 걸까. 혹자는 ‘골프의 그 불가항력 같은 부분이 바로 마약과 같은 매력’이라지만 상습적인 좌절감의 크기는 그냥 놔두고 보기에는 너무 크고 심각하다.

그런데 골프를 할 때마다 번번이 좌절하는 원인은 뭘까. 내가 보기엔 골프 하는 당일의 목적이 너무 다양해서 그렇다.

한마디로 ‘바라는 것이 너무 많다’는 거다. 소풍을 갔는데 돈을 주웠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기대를 갖는다든가, 낚시하러 갔는데 보물이라도 건졌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황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스코어도 좋았으면 좋겠고, 샷도 쭉쭉 날아가길 바란다. 치면 핀에 붙고, 때리면 들어가는 그런 골프를 상상하는 건가.

골프가 우리 마음을 달랠 친구가 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이 행복해지려면 골프에 대한 기대가 분명하고 단순해야 한다. 그렇게 골프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해해야 하는 게 아닌가. 혹은 자연, 친구들과의 소통이라는 더 큰 그림에 목적을 두는 것이 어떤가. 이렇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하고 싶지만 그런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적이 단순하고 목표가 분명하고, 그 단순하고 유일한 목적에 맞게 과정이 잘 설계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골프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얘길 하는 거다. 그 모든 걸 이루기에는 우리의 연습시간은 너무 짧고, 골프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열정은 턱없이 부족하다.

아름다운 스윙, 멋진 샷, 동반자들을 기죽일 한 방의 거리! 동반자와의 친목 도모, 내기에서 돈 따기, 풍광을 즐기면서 휴식하기 등등 그것이 무엇이든 다 좋다. 그런데 제발 한 가지만 바라자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한 가지 아닌가’ 반문하겠지만 골프를 웬만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샷이 안 좋아도 돈은 딸 수 있고, 드라이버가 삐뚤빼뚤 날아다녀도 스코어는 지켜낼 수 있는 거다. 내가 좀 못 쳐야 남들이 좋아하고, 돈을 좀 잃어줘야 분위기가 좋아지는 거다.

나머지를 전부 내려놓고 오직 하나의 목적만으로 한 샷 한 샷 하면서 조심스레 가다 보면 작은 위기들을 이긴 잔잔한 성취감이 다가오고,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이루는 뿌듯한 충만감이 밀려온다.

게다가 운이 좋은 날에는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기도 한다.

이제 곧 가을이다 골프장 풍광이 아름다워질 시간이고, 골프에서도 수확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가는 길뿐 아니라 골프를 다녀오는 길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마음골프학교(www.maumgolf.com)에서 김헌
일러스트=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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