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386세대 목소리 높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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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국에서 치러지는 선거가 단순한 총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참여 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
김기식(金起式·34)
정책실장에게는 하나의 성전(聖戰)
이다.

金실장 등 몇몇 인사들은 4백여 시민·환경·여성 단체를 대표해 이번주 총선에서 선출돼서는 안 될 후보 86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부패·무능은 물론 과거 독재정권과의 연계성이 그 이유였다.

지난주 金실장과 수백 명의 젊은이가 서울 중심가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들은 축구경기에서 퇴장 명령을 뜻하는 레드 카드를 흔들며 ‘바꿔! 바꿔!’를 연호한 뒤 1980년대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시위의 성지인 명동성당까지 행진했다. 金실장은 “1980년대 혁명적 투쟁으로 군사정권에 맞섰지만 지금은 더 성숙하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사회변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386 세대의 선거’라고 불러도 좋을 듯 싶다. 386 세대란 金실장처럼 30대로서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겪은 60년대생을 말한다. 386 세대 스스로 386 마이크로프로세서처럼 강하고 역동적이며 속도가 빠르다고들 말한다.

사실 그들은 이미 한국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번 총선 후보 가운데 1백50명 정도가 386 세대다. 집권 새천년 민주당(민주당)
은 젊은피 수혈을 내세웠다. 다수당인 한나라당을 앞지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신선한 인물을 원했던 것이다. 처음에 젊은피 수혈 전략은 잘 먹혀들었다.

젊은 후보들이 구세대 정치인들을 축출하자는 시민운동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당인 한나라당도 386 세대를 앞세웠다. 현재 총선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번 총선 후보 가운데 40여 명이 열성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한양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임종석(任鍾晳·33)
씨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서울 성동구에서 5選을 바라보는 한나라당의 이세기(李世基)
후보에 맞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任씨는 대북(對北)
연대를 내세우지만 많은 장·노년층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다. 1980년대 후반 전국대학생협의회(全大協)
의장이었던 任후보는 신속한 남북통일을 위해 투쟁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년 간 수감됐다. 그뒤 수년 동안 여러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하며 올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任후보는 “대북 접촉 및 협력 확대가 없을 경우 통일은커녕 평화조차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李후보는 任후보가 다른 386 세대 후보들처럼 너무 과격하다고 비난했다. 任후보는 “미국·유럽, 심지어 대만에서도 정계 지도층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며 “한국 역시 젊은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맞섰다.

30대는 9백만 명에 이르며 그 가운데 3백만 명이 대학을 다녔다. 연공서열에 얽매여 있는 기성 정치·경제·사회·문화 제도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최근 386 세대에 관한 연구서 ‘1980년대, 혁명의 시대’를 엮어 펴낸 한신대 이해영(李海榮)
국제관계학 교수는 “한국의 386 세대가 사회 모습을 완전히 바꿔 놓은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나 유럽의 68년 세대와 흡사하다”고 평했다.

386 세대중 일부는 1980년대 해외여행 규제 완화 조치 이후 유학에 나서 구미(歐美)
재계의 민주적 사고방식을 흡수했다. 재벌기업에 입사해 권위주의적 관행에 혐오감을 갖게 된 젊은이들도 있다. 한편 급진론자들은 강력한 노동운동을 조직했다.

대학 재학중 시위로 두 번 수감된 바 있는 참여연대의 金실장은 노동현장에서 노조결성에 한몫했던 인물이다. 민주화 확산과 더불어 金씨는 재벌의 전횡적인 경영 개혁과 투명성·회계책임 제고를 촉구하는 비정부기구인 참여연대의 탄생에도 일조했다.

격동의 1980년대를 거치며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까지 터득한 30대 컴퓨터 도사들은 새로운 첨단경제도 이끌고 있다. 재벌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젊은 계층이 첨단산업으로 유입됐다. 5천 개가 훨씬 넘는 첨단 신생기업 가운데 반 정도를 386 세대가 운영하고 있다.

혁신적인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로 현재 급성장중인 로커스社의 창립자 김형순(金亨淳·39)
대표는 현재 한국 제2의 거부(巨富)
다. 金씨는 대학 재학중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金씨는 현재 20억 달러 규모의 로커스社 자산 가운데 40%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재벌 총수들과 달리 ‘소유주’로 불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

金씨는 “더 나은 경영인이 있으면 언제라도 물러날 수 있는 대주주에 불과하다”고 자평했다. 재벌의 전횡적인 경영방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金씨는 한 달에 한 번 임직원과 함께 술집에서 대화를 갖는다. 술자리가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한 직원은 金대표가 “임직원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임직원을 섬긴다”고 말했다.

물론 386 세대도 나이를 먹는다. 그들보다 젊은 연령층은 이미 30대가 현실에 너무 안주해 그들이 맞서 싸웠던 장·노년층을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전형적인 386 세대 부부의 수입은 연봉 3천만 원으로 서울 근교 30평짜리 아파트에서 산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고 더 큰 승용차를 소유하는 것이다. 참여연대의 金실장은 “386 세대 스스로 가치를 계속 높이지 않으면 다른 세대와 똑같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金실장에 따르면 이번 총선의 진정한 관건은 20대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20대 유권자들 역시 원칙적으로는 한국의 개방 필요성에 동감한다.

그러나 30대 이후 세대와 너무 괴리돼 있어 상당수가 이번에 투표권을 행사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金실장으로서도 낙선운동 대상에 오른 후보 86명 가운데 얼마나 당선될지 알 수 없다. 옹졸한 정치인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뿌리깊은 지역감정을 건드리려 애썼다. 주변 변화상에 움찔한 장·노년층은 386 세대의 변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번 총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金실장은 계속 투쟁할 각오다. 그는 “1980년대 경험으로 미뤄볼 때 불가능은 없다”고 말했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변화의 조짐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뉴스위크=이 병 종 서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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