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북방 대륙의 ‘뉴 그레이트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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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천둥처럼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듣기 전에 냄새부터 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냄새를 맡을 때면 이미 늦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화살들이 격류처럼 쏟아지면서 해를 가려 낮이 밤으로 바뀐다. 이어 그들이 들이닥친다. 학살하고, 강간하고, 약탈하고, 방화한다. 마치 용암처럼 앞에 놓인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다. 뒤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와 하얀 뼈밖에 남지 않는다.”(피터 홉커크, 『그레이트 게임』에서)

 13세기 유라시아를 제패한 몽골군에 대해 느꼈던 러시아인들의 공포를 이보다 실감나게 묘사한 문장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영국의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홉커크(80)는 “몽골의 침략은 러시아의 정신에 오랫동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고 말한다. 그 상처는 외국인, 특히 동양인에 대한 혐오와 호전적인 외교정책, 압제를 금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나타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최종병기 활’이라는 한국 영화가 무서운 속도로 흥행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개봉 2주 만에 누적관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이끄는 여진족(만주족) 기마부대가 조선을 유린하는 장면에서 나는 홉커크의 명문장을 떠올렸다. 몽골족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공포는 여진족에 대한 조선인들의 공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보면 북방, 러시아로서는 동방의 드넓은 대륙은 공포의 진원지였다. 공포의 땅이 기회의 땅으로 바뀌는 데는 수백 년의 세월이 걸렸다.

 북방 대륙을 남북한 정상이 동시에 방문 중이다. 이명박 대통령(MB)은 몽골과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3개국을 순방 중이고,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러시아 극동 지역을 기차로 여행 중이다. 시기만이 아니라 크게 보아 지역도 겹친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남북한 정상이 나란히 북방 외교에 나서는 진기록이 세워지게 됐다.

 MB의 순방은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얼마나 실속이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80억 달러 규모의 경협 프로젝트 합의가 주목적이라고 한다.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도 경제적 목적이 커 보인다. 러시아 방문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면서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경제적 지원과 참여를 유도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강성대국’ 원년으로 선포한 2012년을 앞두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실리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일 것이다.

 『그레이트 게임』에서 홉커크가 지적한 대로 중앙아시아와 극동 러시아에는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보물 몇 가지가 묻혀 있다. 엄청난 석유와 가스자원은 물론이고 금·은·구리·아연·납·철 등 풍부한 광물자원이 그것이다. 남북한이 새로운 경제적 활로를 찾는다면 그 방향은 북방이 될 수밖에 없다. 만주와 몽골, 연해주, 극동 시베리아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7500만 인구가 경제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광대한 미개척지다. 반도 국가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해양 진출 전략은 일본과 중국에 막혀 있다. 전통적 해양강국인 일본에 이어 중국까지 해양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항모까지 보유한 중국 대양해군의 작전 반경에 동해를 포함해 한반도 주변 해역 전부가 포함될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의 끊어진 허리 위에서 북한이 남한의 북방 진출을 막고 있다. 남한은 섬과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한반도의 분단선을 뚫어야만 남한의 북방 진출로가 열린다. 한때 남북한은 도로와 철도 연결을 추진했었다. 그랬던 남북 관계가 이 지경이 된 데는 연이어 도발의 불을 지른 북한의 책임이 크다. 그렇다고 비난만 하면서 손 놓고 있을 것인가. 따질 것은 따지면서도 미래의 전략적 이익에는 철저하게 계산적이어야 한다.

 이 기회에 남북 정상은 유라시아 지도를 거꾸로 펴놓고 한반도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톰과 제리처럼 아웅다웅 다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남북한이 동시에 변해야 한다. 지금 같은 폐쇄적 고립체제로 북한에 미래가 없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누구나 다 안다. 망할 작정이 아니라면 체제 유지를 위한 현실적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핵 포기의 결단과 함께 서서히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리비아의 카다피 체제는 핵무기가 없어서 망한 게 아니다. 국민과 국제사회가 등을 돌렸기 때문에 망했다. MB 정부도 멀리 크게 보고 유연성을 발휘할 때가 됐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에서 김 위원장은 핵 프로그램의 전면 동결을 선언하기 바란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복귀도 허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6자회담이 다시 가동된다면 북한에 활로가 보일 것이다. MB는 시베리아 가스관이 북한을 거쳐 남한까지 연결된다면 기꺼이 북한에 통과료를 지불하겠다는 약속으로 화답하기 바란다. 남북 간 도로와 철도 연결 사업의 재추진도 제안해야 한다.

 북방 대륙에서 볼 때 한반도는 대륙에서 태평양으로 돌출한 작은 반도에 불과하다. 반도에 갇힌 편협한 사고로는 미래가 없다. 보기 드문 남북한 정상의 동시 북방 외유가 대륙의 시각에서 한반도를 보고, 중앙아시아와 극동 러시아에서 한반도의 앞날을 도모하는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의 출발점이 되길 기대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