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86) 이만희와 문정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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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만추’(1966) 촬영장에서 이만희 감독이 문정숙에게 연기를 지도하고 있다. 실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했다. [사진집 『만추-사라진 영화』(박영률출판사)에서]


영화감독과 배우가 연인 사이로 찍은 영화는 그 호흡이 남다르다. 내가 최고로 꼽는 ‘만추’(晩秋·1966) 뒤에는 이만희 감독과 여주인공 문정숙의 애틋한 사랑이 있었다. 이 감독과 문정숙은 서로 반했다. 이 감독은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남자도 반할 만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녔다. 배우들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었다. 촬영장에서 화를 내지 않고, 지도할 게 있으면 조용히 다가와 귓속말로 했다. 혼을 낼 때도 알밤 주는 시늉을 하며 “임마”라고 귀엽게 속삭였다.

 문정숙은 서구적 마스크지만 천진난만하면서 조용한 전형적 한국 여인이었다. 코맹맹이 소리가 약간 섞인 음성도 매력적이었다. 여배우 중 노래를 가장 잘 불렀다. 그의 매력이 최고로 발휘된 영화는 ‘검은 머리’(64)가 아닌가 싶다. 이 작품에서 문정숙은 조직 보스인 장동휘의 정부로 등장한다. 그러나 보스 부하들에게 린치를 당해 맥주병에 오른쪽 눈을 찔린다. 문정숙은 머리를 내려 오른쪽 눈의 상처를 가린다.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그 머리 스타일이 당시 크게 유행했다. 문정숙의 언니는 북한 인민배우 문정복이다. 문정숙은 연극배우인 언니를 쫓아다니다가 자연스럽게 영화배우가 됐다.

 이 감독과 문정숙은 62년 ‘다이알 112를 돌려라’에서 처음 감독과 여배우로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흔한 감독과 여배우 사이였다. 이 감독이 나와 스타일이 잘 맞았던 것처럼, 여배우 중에선 문정숙과 찰떡궁합이었다. 이 감독 영화의 3분의 1 이상이 문정숙 주연이다. 문정숙이란 여배우의 장단점을 꿰고, 그것을 최대한 돋보이도록 한 사람이 이 감독이다. ‘만추’의 농익은 여자 주인공은 당연히 문정숙의 것이었다.

 이 감독과 문정숙을 가장 잘 아는 배우 이해룡은 두 사람이 ‘검은 머리’를 통해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추측한다. 이 감독이 문정숙에게 푹 빠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에겐 각각 배우자와 아이가 있었다. ‘천생연분인데 왜 이렇게 늦게 만났는가’라고 한탄하는 안톤 체호프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남녀 주인공처럼…. 일각에선 둘의 관계를 좋지 않게 보았지만,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동거를 한 것도 아니었다. 데이트 장소가 마땅히 않아 뚝섬에 신혼살림을 차린 이해룡의 집을 간간이 빌리기도 했다.

 문정숙은 남편과 갈라선 후 아이와 함께 약수동에서 살았다. 이 감독은 밤에 가끔씩 그 집을 찾아갔다. ‘만추’ 촬영 막간을 이용해 문정숙은 내게 지난밤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미스터 신, 나 밤에 한 잠 못 잤어. 이 감독이 술 먹고 들어와 개가 짖는다고 발로 찼다고. ‘아저씨가 개 죽인다’고 우리 아이가 울고 고함지르는 바람에 힘들었어.”

 둘 사이에는 간간이 트러블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67년 전쟁영화 ‘얼룩무늬의 사나이’ 촬영 차 베트남에 3개월 가량 같이 로케이션을 갔다. 마지막으로 함께한 작품은 74년 ‘청녀’다. 다투고, 사랑하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문정숙과 누구보다 친했던 엄앵란은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이라고 부른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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