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군단 청산리 전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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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호 29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일 러시아 극동 지역을 찾았다. 그의 공식 출생지는 백두산 밀영이지만, 실은 극동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김일성 주석이 해방 전 소련군에 몸담고 있을 때다. 이 지역은 구한말부터 조선인들이 이주해 살았던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는 독립운동 기지였다. 1920년 청산리 대첩도 극동에서 얻은 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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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배경에는 체코 군단과 한국의 인연이 자리 잡고 있다. 체코는 1918년 독립 전까지 오랫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를 받았다. 체코 군단은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해외 망명객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징집됐다가 연합군 포로가 된 체코인들이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비롯한 추축군에 맞서 싸우려고 만든 부대다. 목적은 체코 독립이었다. 이들은 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세르비아 전선에서 추축군에 맞서 싸웠다. 러시아의 체코 군단이 가장 규모가 컸다.

하지만 1917년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브스크 협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체코 군단은 독립을 얻을 때까지 싸울 각오였다. 이들은 병력과 무기를 유지한 채 자력으로 프랑스로 가서 전쟁을 계속하려고 했다. 혁명으로 길이 막히자 이들은 무장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세계 일주다. 이들은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와 제정러시아를 복구하려는 백군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우여곡절 끝에 통과해 유럽으로 돌아갔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1920년 중반까지 6만7739명이 귀국했다. 그사이 전쟁은 끝나고 새로 탄생한 조국 체코슬로바키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체코 군단의 라돌라 가이다 장군은 백군을 돕다가 별도로 귀국했는데, 그의 부대가 보유 무기의 일부를 우리 독립군에 판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이한 것은 무기의 상당수가 미국제라는 것이다. 산업시설이 부족했던 제정러시아는 자국 육군의 기본무기인 모신나강(M1891) 소총을 충분히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 레밍턴사에 150만 정을, 웨스팅하우스사에 180만 정을 각각 주문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까지 75만 정을 제작했는데 47만 정만 납품했다. 남은 28만 정은 미군이 인수해 일부는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에 파병한 연합군 부대에 지급했다. 5만 정은 당시 시베리아에 머물던 체코 군단에 공급했다. 체코 군단의 미제 러시아식 무기로 우리 독립군이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독립운동을 포함한 한국의 근대사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최근 야로슬라브 올샤 주한 체코공화국 대사가 한국사 관련 자료들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가운데 체코 군단이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한 신문 ‘덴니크’의 원본이 포함됐다. 이 신문엔 3·1 운동 관련 기사도 실렸다고 한다. 참으로 귀중한 사료가 한국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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