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똑같다” 가르침 … 어머니 기일 팔에 새기고 달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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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호 06면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훈련 중인 피스토리우스. 첫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그는 20일 오후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뒤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대구에 도착했다. [중앙포토]

그들이 바라는 것은 동정이나 특별 대우가 아니었다. 27일 개막하는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특별한 두 선수가 참가한다. J자 모양의 탄소섬유 의족을 착용해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 불리는 오스카 피스토리우스(25·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시각장애를 갖고 있어 ‘블라인드 러너(Blind runner)’라는 별명을 얻은 제이슨 스미스(24·아일랜드)다. 두 사람은 세계육상선수권 최초로 비장애인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한다.

대구세계육상 D-6 장애의 벽·차별 무너뜨린 피스토리우스

스포츠에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을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구별하고 그들끼리만 경쟁할 것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이번 대구육상을 계기로 장애인-비장애인 차별의 장벽이 무너졌다. 경쟁의 공평성을 쟁취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학생 때 럭비·테니스·레슬링 선수
피스토리우스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났다. 날 때부터 양다리 종아리뼈가 없었던 그는 생후 11개월에 무릎 아랫부분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6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2002년 3월 간염 오진으로 사망한 어머니는 정신적 안식처이자 좋은 친구였다. 피스토리우스는 “형과 네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다리만 없을 뿐이다. 타인에게 동정받지 말라”던 어머니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의 오른팔 안쪽에는 어머니가 태어난 날짜와 운명한 날짜를 새긴 문신이 있다. 15살 때 어머니의 죽음을 맞은 그는 “심장이 터질 듯한 아픔을 느꼈다”고 했다.

제이슨 스미스

피스토리우스는 학생 시절 럭비·테니스·수구·레슬링 선수로 활약했다. 혈기 넘치는 이 청년은 밤이면 오토바이로 스피드를 즐긴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유머’. 그는 “자책한다고 내 상황이 나아질 수 있나. 웃음과 유머가 내 컨디션 관리 비결”이라고 말한다.

육상과 인연은 우연히 시작됐다. 2003년 럭비경기 중 큰 부상을 당했다. 트랙을 돌며 재활치료를 하던 그는 ‘달리기’에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2004년 아테네패럴림픽 남자 200m 부문 금메달을 땄다. 2005년 패럴림픽 월드컵에서 100m·200m를 동시 석권한 후 2006·2007년에는 100m·200m·400m 등 단거리 종목에서 장애인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육상 입문 4년째 되던 해, 그는 비장애인과 경쟁을 꿈꿨다. 피스토리우스는 2007년 7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골든 갈라 대회 400m에서 처음으로 비장애인과 대결을 펼쳤다. 조 예선 2위(46초90)로 결승선을 통과한 그는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로 시선을 넓혔다.

스포츠중재재판소 “의족 이점 없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던 그에게 반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이 ‘스프링이나 바퀴 또는 다른 기술장비를 활용해 현저한 이점을 안게 되는 선수는 올림픽 등 주요 육상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육상 규정 144조 2항을 들어 올림픽 출전을 불허했던 것. IAAF는 “보철 의족을 허용하면 다른 선수들이 ‘제트기’까지 착용하려 들 것”이라고 했다.

독일 쾰른대 생체역학연구소의 연구 결과도 나쁜 영향을 줬다. IAAF의 의뢰를 받은 이 연구소는 ‘보철 의족이 같은 스피드의 선수와 비교해 25% 정도 에너지 손실을 줄이는 효과가 있으며 종합적으로 비장애 선수보다 30% 정도 유리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플렉스 풋’이라고 불리는 스포츠 보철 의족은 탄소 소재로 만들어졌다. 뛸 때 무릎과 엉덩이의 충격을 흡수해 이 에너지를 탄성으로 전환한다. 당연히 추진력도 뛰어나다. 한 응용생리학회지 논문에는 피스토리우스가 보철 의족을 사용해 400m 기록을 10초 이상 앞당긴다는 주장이 실리기도 했다. IAAF가 2008년 1월 피스토리우스가 IAAF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고 주장한 근거도 이 학회 논문이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피스토리우스는 “의족 때문에 남들보다 이득을 보지 않는다. IAAF의 결정에 불복한다. 법적 투쟁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지원이 이어졌다.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는 “IAAF가 쾰른대에 연구를 의뢰할 때 IPC가 배제됐다. 바이오메카닉스(생물의 운동을 기계공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측면뿐만 아니라 선수의 생리적인 부분까지 포함해 조사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플렉스 풋 제작 업체인 오서(Ossur)는 ‘보철 의족이 기록 단축에 큰 도움을 주지 않으며, 피스토리우스의 능력이 특별하다’는 내용의 실험 결과를 내놨다.

듀이&르뵈프 국제법률사무소는 무료 법률 자문과 변론을 약속했다. 피스토리우스는 “장애 선수를 대표해 보조기구를 사용해 경기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것에 반대한다”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설립한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했다. 그리고 2008년 5월 17일. 그토록 기다렸던 판결문을 받아들었다. CAS는 중재 패널 만장일치로 ‘경기 중 보철 다리로 부당한 이점을 얻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면서 피스토리우스를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도록 한 IAAF의 결정을 뒤집었다. 라민 디악 IAAF 회장도 “CAS의 판결을 받아들인다. 피스토리우스의 성취는 세계를 감동시킬 것”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한쪽 다리 없는 뒤투아, 올림픽 수영 16위
그러나 피스토리우스는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기준기록(45초55)에 0.7초가 모자랐다. 그러나 그는 지난달 이탈리아 리냐노에서 열린 육상 그랑프리대회 남자 400m에서 45초07의 기록으로 세계선수권 A기준 기록인 45초25를 통과하면서 대구행 티켓을 따냈다. 피스토리우스는 400m에만 출전한다.

대구에 온 시작장애 스프린터 스미스는 시력이 일반인의 10%에 불과하다. 그는 지난 5월 10초22를 기록하며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의 100m B 기준 기록(10초25)을 통과했다. 피스토리우스에 이어 장애인으로는 두 번째로 세계육상선수권 티켓을 따낸 그는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각오를 다졌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벽을 허문 선수들은 더 있다. 나탈리 뒤투아(27·남아공)는 한쪽 다리 없이 베이징 올림픽 여자 수영 10㎞에 출전해 25명 중 16위를 차지했다.

경기도 평택 에바다학교(청각장애 특수교육기관) 탁구부를 전국 최강으로 끌어올린 권오일 교장은 “올림픽이나 국제대회는 인류 화합을 위한 장이다. 기록에만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정정당당하게 겨루기 위해 땀 흘리는 스포츠 정신을 높이 사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스토리우스의 의족에 전자·기계 장치가 포함된 게 아니라면 선수의 땀과 노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 교장은 스포츠에서 장애인-비장애인 장벽이 점점 허물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스포츠를 통해 경쟁하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스포츠 통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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