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사진 보여주길 꺼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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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코닥의 존 베이(중국명 白小軍·미국)
사장은 카메라를 일곱 대나 갖고 있다. 그는 틈만 나면 사진을 찍는다. 서울 연지동 연강홀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가족 사진으로 가득하다. 사방 어디에 눈길을 줘도 아내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과 마주친다. 베이 사장이 한해 찍는 필름 양이 미국인의 평균인 6롤을 넘어설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한국인은 그만큼 사진찍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미국에선 아이의 첫 입학식때 으레 기념사진을 찍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인구 1명당 한해 3롤에도 못미치는 한국인의 필름 소비량을 어떻게 늘리느냐가 그가 극복해야 할 과제다.

나라별 필름 소비량을 보면 일본이 한해 1인당 8∼9롤로 단연 앞서고, 미국과 유럽(4롤)
이 그 뒤를 잇는다. 중국은 아직 1롤에도 못미치지만 최근 몇 년새 연 30%를 웃도는 빠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카메라 보급률이 90% 수준에 이를 정도로 높지만 필름 소비량은 아직 낮은 수준이다.

한국인은 직장에서 가족사진을 책상에 놓아두는 일이 드물다. 베이 사장은 “한국인은 사진을 남에게 보여주길 부끄러워 한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층이 보수적인 중·장년층과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건 그에게 반가운 조짐이다.

베이 사장은 만약 한국의 대기업이 필름사업에 진출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으로 본다. 일본인들이 사진찍기를 유난히 좋아하게 된 데는 자국 업체인 후지필름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한국엔 제대로 된 필름업체가 없어 코닥·후지·코니카 등 외국 업체가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두산과 합작으로 영업을 시작한 코닥은 지난 1996년 두산 지분 49%를 인수해 1백% 외국인 회사가 됐다. 현재 전국에는 코닥익스프레스 점포가 2천여 곳 있다. 사진현상소 3곳 중 1곳이 코닥 점포인 셈이다.

지난 1880년대 조지 이스트먼이 창업한 코닥은 현재 세계 필름 시장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1위 업체다. 코닥은 제품의 질을 자신한다. 베이 사장은 “할리우드의 영화필름은 거의 전부 코닥 제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름 전문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코닥을 골랐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또 코닥이 “추석에 쓰다 남은 필름을 성탄절까지 이어서 쓰고, 설날 때 또 써도 몇 개월 전에 찍은 이미지를 그대로 간직하는 등 기술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경쟁사에 비해 값은 비싼 편이지만 고객이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코닥은 필름의 디지털화라는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미지를 파일로 보존하는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이 필요없는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코닥 내부에서도 디지털화가 코닥의 전통적인 비즈니스를 ‘죽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베이 사장은 “스스로의 비즈니스를 공격함으로써 코닥은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코닥은 지난해 미국 2위의 프린터 업체인 렉스마크社와 제휴를 맺었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메모리 카드를 빼 프린터에 연결만 하면 사진을 뽑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 이미 미국에 등장했다. 베이 사장은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미국에 있는 친구나 친척들에게 e메일로 보낸다.

그는 뉴욕의 로체스터大에서 화학 석사, MIT 경영대학원(슬로언 스쿨)
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각각 받았다. 미국의 경영컨설팅 회사인 베인&컴퍼니에서 잠깐 근무한 것을 빼고는 코닥에서만 20년 넘게 일하고 있다. 한국엔 지난 97년 3월 부임했다.

그는 중국계 이민 2세다. 軍 장성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국민당 정권이 붕괴하기 직전인 지난 48년 군사훈련차 미국으로 갔다가 귀국을 포기했다. 어머니 역시 중국에서 홍콩으로 탈출했다가 아버지를 만나 미국에서 결혼했다. 베이 사장은 8남매중 ‘넘버 3’이다.

자식 8명은 박사·의사·검사·기업체 임원 등으로 하나같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모 덕분이었다. 베이 사장은 온 가족 수십 명이 한자리에 모여서 찍은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도 아이가 넷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한국에서 살다 보니 재미난 일도 많다. 그를 한국사람으로 오인해 말을 걸어오는 일은 다반사다. 같은 외국인들도 그를 한국인으로 알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제3자 입장에서 한국인과 서구인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편견을 느낄 때도 있다.

그는 한국과 중국 문화간에 서로 통하는 게 많아 한국 고객을 대할 때 유리하다고 말한다. 고객을 상대할 때는 좋겠지만 근엄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유교가치가 필름의 소비 증진에는 별 도움이 안될 것 같다. [뉴스위크=곽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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