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 사쿠하치 선율 만나니 새로운 재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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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리 리

13일 밤 청풍호반을 가르는 청아한 선율에 3000여 관객이 빨려 들었다. 일본 거장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1903~63)의 무성영화 ‘태어나긴 했지만’(1932)이 상영된 제7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야외무대. 무성영화는 지루할 거라는 짐작은 빗나갔다. 일본 전통 목관악기인 사쿠하치 연주가 곁들여졌기 때문. 중국계 미국인 연주자 라일리 리(60)는 1시간 30분간 사쿠하치와 4대와 시노부에(일본 전통 피리) 1대를 바꿔가며 연주했다.

 ‘태어나긴 했지만’은 아버지가 직장상사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며 대드는 초등학생 형제의 이야기다. 가족애를 다룬 훈훈한 주제에 슬랩스틱 코미디가 가미돼 객석에선 자주 웃음이 터졌다. 리의 연주는 때로는 배경음악으로 쓰였다가 때로는 효과음이 되면서 분위기를 돋웠다.

 대나무로 된 사쿠하치는 우리 퉁소나 대금과 비슷하지만 크기가 훨씬 크다. 앞쪽 구멍 5개와 뒤쪽 구멍 1개로 소리를 낸다. 리는 1970년대부터 사쿠하치를 연주해왔다. 국내 발매된 ‘대나무숲을 지나는 바람’ 등 음반 60여 장을 발표했다.

 그가 사쿠하치를 만난 건 대학생 시절. 세계일주 배낭여행 마지막 장소였던 일본에서 영어교습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알게 됐다. 석 달 예정의 일본 체류기간이 7년으로 늘어났다. “사쿠하치는 인간의 목소리 다음으로 표현력이 뛰어난 악기죠. 기쁨·슬픔·분노·고독 등 다채로운 감정을 나타낼 수 있어요. 영화와 더할 나위 없는 짝이 되는 것 같아요. 한번 연주를 들으면 바로 사쿠하치의 팬이 되죠.”

 그는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현악4중주단·록밴드·재즈밴드·하피스트 등과 합주를 했다. 2년 전 호주 시드니 무성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영화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오즈 야스지로의 ‘지나가는 마음’(1933)과 사쿠하치 선율을 합쳤다. “연주 전 영화를 보고 또 보죠. 작품성이 뛰어나면 그만큼 작업도 쉬워져요. 악보는 따로 만들지 않아요. 절반은 머릿속에 있고 절반은 즉흥연주죠. 피아노 건반처럼 악기 크기에 따라 음역이 다르기 때문에 늘 영화 한 편에 여러 대의 사쿠하치를 준비합니다.”

 그는 지난해 말 교통사고를 당해 7차례 대수술을 받았다. 아직도 목발을 사용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50분대에 완주하던 그다. 하루 8시간 연습, 영화 상영 내내 연주 등을 너끈하게 소화하는 폐활량의 비결이다. “사고 이후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제천영화제가 재기의 기회가 된 것 같아 기쁩니다.” 제천영화제는 16일 폐막한다.

제천=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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