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이른 항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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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구 주석은 중국 서안(西安)에서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와 저녁식사 후 담화하던 도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라고 한탄했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이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라고 표현했던 김성숙(金星淑:김충창)은 민족주의 좌파 협동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임정 국무위원에 취임했다. 그도 항복 소식을 듣고, “전 민족이 함께 걸어나가야 할 앞길은 먹구름 같은 외세에 가로막혀 캄캄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냐”라고 회고했다(오호! 임정 30년 만에 해산하다, 『월간중앙(1968년 8월)』). 중국 곤명에서 OSS 훈련을 받았던 독립운동가 정운수(鄭雲樹)가 “그때 국내로 침투하기로 되어 있던 제2지대 광복군들이 모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1986)』)”라고 말한 것처럼 국내 진공작전의 대가로 참전국의 지위를 획득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출신의 광복군 제3지대 1구대장 박영준(朴英俊)은 일본 패망 직후 김구 주석이 중국의 장개석 주석에게 중국 내 일본군의 한적(韓籍) 사병 10만 명을 넘겨주면 10개 사단으로 편성해 귀국하겠다고 요청했다고 전한다. 장개석도 동의했지만 미 군정에서 개인 자격의 귀국을 종용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는 것이다(『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1945년 2월 미·영·소 3국 수뇌의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일본군과 싸우는 대가로 과거 제정 러시아의 만주 이권 반환 등을 요구했다. 겉은 사회주의 체제였지만 속은 슬라브 민족주의의 재연이었다. 소련의 참전 조건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1945년 8월 6일, 9일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폭을 투하하자 소련은 부랴부랴 8월 9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만주의 관동군이 소련군에 궤멸되면서 일제는 예상보다 일찍 항복했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임정은 통곡해야 했다. 임정이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려는 찰나 태평양전쟁의 막이 내려진 셈이었다.

 분단체제, 6·25사변 등은 우리가 참전국의 지위를 갖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도 국제정세는 배우의 등장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외세가 민족의 운명을 좌우했던 20세기와 다른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광복절의 임무일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