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방패’의 힘…외국인, 이틀간 주식 1조2573억 팔았지만 채권 9360억 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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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신용등급 강등 충격으로 한국 증시가 연일 홍역을 치르면서 외채 위기론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1997~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모두 외채나 외환 같은 대외 부문에서 파열음이 터져나온 데 따른 학습효과다. 증시 폭락은 세계적 현상이지만 대외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운명은 결국 외환시장에서 판가름이 난다.

최종구 기획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차관보)은 9일 브리핑에서 최근의 시황과 관련해 눈길 끄는 분석을 내놓았다. 외국인은 전날 코스피 시장에서 816억원을 판 데 이어 이날 1조1757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올 3월 동일본 대지진 때 이후 사상 둘째로 많은 규모였다. 그런데 외환시장은 오히려 하루 전보다 안정적이었다. 달러 대비 원화가치는 5.60원 떨어진 1088.10원에 거래를 마쳤다. 외국인의 주식 매물이 쏟아졌는데 왜 원화가치는 비교적 덜 떨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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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차관보는 “외국인이 주식을 팔았지만 팔고 나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2~3일 더 지켜봐야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다”는 전제를 달면서도 “외국인들이 저가 매수 기회를 노리며 대기하고 있거나 원화가치가 더 떨어질 것 같지 않아 주식 판매대금을 달러로 바꿔 한국을 떠나가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장을 안정시키고 싶어 하는 정책 당국자의 기대가 섞여 있지만 나름 설득력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한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팔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투자처를 찾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한국 이외에 갈 곳이 딱히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주식 대신 안전한 채권으로 향하는 글로벌 추세에 맞게 외국인은 이날 채권시장에서는 2029억원을 순매수했다. 전날에도 7331억원이나 사들였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출렁거리는 요즈음 한국의 ‘외환 방패’는 안전한가. 외환보유액은 7월 말 현재 3110억 달러로 늘었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경제연구실장은 “외환위기 때처럼 ‘곳간이 비면 안 된다’며 외환보유액을 늘렸다. 그 과정에서 외환보유액을 쌓는 비용도 많이 드는데 이렇게까지 쌓을 필요가 있느냐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외환보유액이 빛을 발한다”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과 달리 지금은 경상수지도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재정상황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다.

 일부에서는 4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총외채 규모를 걱정한다. 그러나 KDI 이한규 박사는 “단순히 총외채 규모만 보는 것은 난센스”라며 “외채가 약간 늘었지만 이는 상당 부분 외국인의 국채·통안채 투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의 총외채는 2008년 9월 말 3651억 달러에서 2011년 3월 말 3819억 달러로 늘기는 했다. 하지만 이 기간 중 정부부문 외채가 290억 달러 늘었는데 이 가운데 249억 달러가 외국인의 국채·통안채 투자다. 최종구 차관보는 “외채 증가의 가장 큰 요인인 외국인의 국채 투자는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한국을 힘들게 했던 게 은행이 조달한 외채였다. 이번엔 확 달라졌다. 은행 부문의 외채가 2008년 9월 말 2195억 달러에서 올 3월 말 1919억 달러로 줄고, 특히 은행의 단기외채는 같은 기간 1594억 달러에서 1151억 달러로 443억 달러나 줄었다. 올 들어 은행부문 단기외채가 약간 늘었지만 국내 외화채권(이른바 ‘김치본드’) 투자 금지 등 외환당국의 선제적 조치 덕분에 안정화되고 있다고 정부는 설명했다. 최종구 차관보는 “은행의 외화유동성이 이전보다 많이 개선돼 은행을 믿을 수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말해 최근 김석동 금융위원장의 “은행에 세 번 속았다”는 발언과 대조를 보였다.

 외채의 구조도 좋아졌다. 총외채 대비 단기외채 비중은 리먼브러더스 사태 당시인 2008년 9월 말 51.9%에서 올 3월 말 38.4%로 줄었다.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도 같은 기간 79.1%에서 49.1%로 크게 감소했다.

 외채만 볼 게 아니고 대외 자산도 함께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한국은 대외채무보다 대외채권이 더 많은 순채권국”이라고 말했다. 3월 말 현재 한국의 대외채권은 4660억 달러로 총외채보다 841억 달러가 많다.

 최근 한국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빠르게 오르고 있지만 아직 양호한 수준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CDS는 채권 발행 주체가 부도나면 보상해 주는 파생상품으로 CDS 프리미엄은 부도 위험을 없애는 대신 내는 보험료라고 할 수 있다. 한국물 CDS 프리미엄(5년물)은 8일 136bp(1bp=0.01%)로 프랑스(159bp)와 벨기에(243bp), 이탈리아(344bp), 태국(150bp)보다 낮았고 일본(94bp)보다는 높았다. 최종구 차관보는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채권시장에서 한국물이 32%를 차지할 정도로 다른 국가보다 해외 채권 발행규모가 크다”며 “따라서 외국인이 채권을 사면 헤지(위험 회피) 수요도 커지기 때문에 CDS 프리미엄이 비교적 높게 상승한 것으로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서경호·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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