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 “그는 젊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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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호 09면

기형도의 마지막 몇 년을 이야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다. 그보다 5개월여 전에 세상을 등진 박정만 시인, 그리고 그보다 1년3개월여 뒤 세상을 떠난 평론가 김현이다. 박정만은 기형도의 문학기자로서의 위상을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이한 시적 체험을 매개로 시적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김현은 기형도의 사후 그의 시 세계를 집중 조명함으로써 그가 불세출의 걸출한 시인이었음을 확인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22> 기형도, 죽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 下

1988년 2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 박정만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그 얼마 전 나는 편집국을 떠나 출판국으로 옮겨 가 있었다. 박정만은 기형도와 인터뷰 약속이 있는데 나를 만나기 위해 조금 일찍 왔다고 했다. 그 전해 말 약 한 달 동안 끼니때마다 밥 대신 소주 두 병씩 마시며 마치 봇물 터지듯 300여 편의 시를 쏟아내 한꺼번에 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으나 기형도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기형도가 박정만을 믿었던 것은 자신도 비슷한 시적 체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기형도는 자신의 시적 체험을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었다. ‘자면서도 시를 쓰고, 밥을 먹으면서도 쓰고, 길을 걸으면서도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기형도는 ‘과작의 시인’이었다. 머릿속이 시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품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발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시작노트를 슬쩍 들춰본 일이 있었다. 알아보기 힘든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차 있었고, 군데군데 암호나 기호 혹은 스케치 같은 것도 곁들여져 있었다. 기형도는 그 노트에서 마치 보물을 캐내듯 시를 뽑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기형도의 그런 감춰진 시적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한 사람이 김현이었다. 그 무렵 나는 김현을 꽤 자주 만나고 있었는데 그는 만날 때마다 기형도와 그의 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는 기형도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시인이라고 칭찬하면서도 그의 지나친 완벽주의가 오히려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내가 기형도와 함께 일할 때 그에게 ‘소심한 완벽주의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던 것과도 통하는 지적이었다.

기형도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해 3월 초순께의 일이다. 어느 아침나절 기형도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들고 온 원고를 내밀며 읽어봐 달라고 했다. 김현이 쓴 그달의 ‘시 월평’ 원고였다. 10장 분량의 그 원고는 앞의 절반가량이 기형도의 작품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자신이 문학담당인데 어떻게 이 원고를 자신의 손으로 데스크에 넘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김현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언급은 빼고 원고를 새로 써달라고 부탁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며 달랬으나 기형도는 막무가내였다. 오랜 승강이 끝에 하는 수 없이 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황을 듣고 난 김현은 한참을 웃다가 마지못해 응낙했다.

기형도가 그토록 갈망했던 문화부와 문학담당 기자의 일을 고작 2년 남짓 만에 끝낸 것도 그의 그런 기질이 빌미가 됐으니 그것도 그의 운명이었다고나 할까. 발단은 그해 여름의 어떤 방송기사였다. 그 무렵 방송은 새로 문화부의 막내가 된 박해현 담당이었으나 그가 새로 창간되는 경제신문으로 전출되면서 방송은 다시 기형도가 잠정적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기형도는 다시 그전처럼 날카롭게 방송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어느 날 데스크의 손질을 거쳐 넘어간 방송기사를 기형도가 한밤중 조판실로 들어가 직원들의 협조를 얻어 본래의 자기 기사로 복원시키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 신문은 그대로 발행됐고 해당 방송사와 시끄러운 문제가 발생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이 일로 해서 기형도는 문화부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기형도의 잘못임은 분명했으나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실수였고 평안한 시대였다면 유야무야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편집부로 자리를 옮긴 기형도의 모습에는 좀 더 짙은 그늘이 드리웠고 말수도 더욱 적어졌다. 그는 한가한 시간이면 내 자리로 찾아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가곤 했다. 그렇게 여러 달이 흘렀다. 그사이 기형도는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경상도·전라도 일대를 둘러보기도 했다. 늘 혼자였다. 여행을 할 때마다 내게 안부를 묻는 엽서를 보내곤 했다.

해가 바뀌고 89년 3월 6일 오후, 타계하기 불과 일고여덟 시간 전 기형도가 나를 찾아왔다. 그날 나는 밖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들어오지 못하고 내 자리로 전화를 걸었다가 기형도와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뭔가를 이야기하려다 말문을 닫고 내일 다시 찾아뵙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박해현이 젖은 목소리로 기형도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알렸다.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아침에 이어 점심때 다시 빈소를 찾았으나 기형도의 죽음이 영 믿기지 않았다. 밤늦게 다시 찾았을 때 기형도 또래의 젊은 시인들이 까닭 없이 집단난투극을 벌인 패닉의 흔적을 보고 그때서야 기형도의 죽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29세 생일을 엿새 앞둔 기형도의 짧은 생애는 그렇게 허무하게 종말을 고했다.

문학과지성사가 준비 중이던 기형도의 첫 시집은 두 달 후 출간됐다. 김현이 제목을 ‘입속의 검은 잎’으로 정했고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부제: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이라는 해설도 썼다. 김현은 기형도의 작품 세계를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명명하고 말미에서 “기형도의 시를 읽어보면, 그는 젊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 오고 가는 이 세상은/시작도 끝도 본시 없는 법!’이라는 오마르 카얌의 시구를 인용하기도 한 김현 역시 이듬해인 90년 6월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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