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차긴-빌 게이츠, 중국의 '영웅 논쟁'

중앙일보

입력

중국인들이 요즘 진정한 영웅상을 놓고 불꽃 튀는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다. 중국 관영 CCTV(中央電視臺)가 지난 2월 28일부터 방영하고 있는 20부작 드라마 '강철은 어떻게 단련, 만들어졌는가' 때문이다.

황금시간대인 오후 8시부터 전파를 타는 이 드라마는 불굴의 의지와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사회주의 영웅 파벨 카르차긴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옛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파샤(파벨의 애칭)는 사회주의 소련 건설 전쟁에 참여했고, 그때의 부상으로 장애인이 된 뒤에도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위해 헌신하다가 32세에 요절했다.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자전적 소설인 원작은 중국에서만 지금까지 2백80만부나 팔린 베스트 셀러다. 30대 이상의 중국 지식인들 중에는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 한국에도 번역돼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

중국 당국은 개혁개방 이후 만연되고 있는 관리들의 부패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이 소설을 새삼 드라마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정부가 1천2백만 위안(약 15억원)을 들여 우크라이나 현지 촬영으로 러시아에서도 잊혀지고 있던 파샤를 되살렸다.

그런데 정보통신 업체의 한 20대 청년이 지난 11일 베이징(北京)의 유력지인 베이징청년보에 "카르차긴과 빌 게이츠 중 누가 진정한 영웅이냐" 며 띄운 편지 한 통이 같은 신문에 실리며 뜻밖의 반향을 일으켰다. 양측 지지자들의 편지가 하루에 수백통씩 신문사에 날아든 것이다.

베이징청년보는 최근 10여일간 1면 등의 일부 지면을 할애해 독자들이 공개토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누가 진정한 영웅이냐를 가리는 논쟁은 지금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게이츠는 개인적 이윤을 추구하는 한낱 상인에 불과하며 카르차긴의 사회봉사 정신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는 영웅의 모습이다. "

"카르차긴이 영웅으로 추앙받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게이츠다. "

양측의 주장은 팽팽하다. 그러나 나이가 어릴수록 게이츠 지지파가 압도적이다. 한 교사가 학생 60명을 상대로 조사했더니 36명이 게이츠를 지지했고, 4명만이 카르차긴 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카르차긴과 게이츠 모두 중국인들이 배워야할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한 대학 강사는 "카르차긴처럼 헌신적으로 일해 게이츠처럼 부자가 되는 게 중국 청년들의 진정한 영웅상"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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