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주목받는 비결은 고유한 아이덴티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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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호 02면

1, 2, 3, 4 퐁피두 메츠 내부 전시장 모습 5, 6, 7, 8 퐁피두 메츠에서 전시중인 다니엘 뷰렌의 작품 Photo Rémi Villagi, Photo Roland Halbe

-퐁피두 분관은 어떻게 생기게 됐나.
“프랑스 정부는 몇 년 전부터 문화의 지방 분권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 퐁피두센터 분관 건축 프로젝트도 그중 하나다. 퐁피두의 컬렉션은 7만여 점에 달하는데 파리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1000여 점 정도다. 그래서 지방의 여러 도시에 작품을 대여해 주다가 결국 분점을 열기로 했다. 2000년에서 2001년 사이 신청을 받았고 심사를 거쳐 메츠가 선정됐다.”

개관 1년 만에 관람객 90만 ‘퐁피두 메츠’ 로랑 르 봉 관장에게 듣는 성공 스토리

-메츠가 선정된 이유는.
“우선 메츠시를 이끄는 장 마리 로 시장의 의지가 매우 컸다. 또 이전에 퐁피두 관장을 지냈고 현재 베르사유궁 관장 장 자크 아야공의 도움도 컸다. 그는 퐁피두센터 관장을 맡았을 때부터 퐁피두센터 컬렉션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메츠가 선정된 것은 강한 의지는 물론 프로젝트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재정적 능력이었다. 프랑스 문화 지방 분권화의 골자는 국가가 재정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당 도시의 자체적 재정으로 프로젝트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퐁피두 분점의 경우 지원 도시가 미술관을 짓는 것부터 이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 했는데 메츠시는 이 모두를 자신 있게 증명했다.”

-다른 도시들은 재정적 능력이 없었나.
“물론 후보 도시 중에는 릴이나 몽플리에 같은 유력한 도시들도 있었다. 하지만 메츠는 한 지역을 대표하는 주요 도시임에도 이곳에 중요한 근현대 미술관이 없었다는 것이 선정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보는가.
“개장 이후 일 년 동안 90만 명이 보고 갔다. 이는 파리의 퐁피두센터 다음 기록이다. 현재로서는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메츠는 파리에서 기차로 딱 84분 거리이고 미술관은 기차역 바로 옆이다. 고속도로도 바로 옆이고 주차장도 넓다. 또 유럽의 동쪽과 북쪽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유럽의 교차로 역할도 수행한다. 룩셈부르크와 독일은 40분 거리이고 벨기에와도 매우 가깝다. 이런 요인들이 첫해에 많은 관람객을 끌어들였다고 본다.”

-어차피 메츠시가 자체적으로 재정을 해결했다면 왜 ‘메츠 근현대 미술관’이 아닌 ‘퐁피두 메츠’를 짓게 됐나.
“이 프로젝트의 주된 골자는 파리의 문화시설을 지방으로 옮기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메츠 근현대 미술관이 되려면 메츠시만의 미술품 컬렉션이 있어야 했는데, 자체 미술관을 건설하더라도 그 안을 채울 수 있는 컬렉션이 없었다. 퐁피두 메츠에 갔었다면 2층 갤러리에 전시된 자코메티 조각을 보았을 것이다. 그 작품 하나의 가격이 퐁피두 메츠 전체 건물의 가격과 같거나 더 높다. 이런 수준급 컬렉션을 메츠시가 구축하려면 한 세기도 더 걸릴 것이다. 퐁피두 분관이 됨으로써 메츠시는 퐁피두 본관의 풍부한 컬렉션 혜택을 대여료 없이 받게 된 것이고, 퐁피두 센터의 설립 의지와 그 ‘본연의 역할’도 함께 기리게 되는 것이다.”

-그 ‘본연의 역할’이란.
마스터피스?’ 전시를 보면 회화뿐 아니라 조각·영상·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예술이 풍부한 주제를 어우르고 있다. 그 안에는 강의장이나 회의장, 스튜디오 등이 함께 있다.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이 퐁피두센터를 건립했을 때에는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미술관을 통해 전파하고자 했다. 아울러 이 시대의 예술가들과 사회를 이어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처럼 문화적 역사가 깊은 나라에서 문화의 지방 분권화가 다소 늦어진 건 아닌가.
“맞는 지적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파리 그리고 프랑스 사막(
)’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모든 것들이 파리에 집중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년 전부터 많이 달라졌다. 프랑스 전역에서 많은 일들이 자체적으로 활성화되고 정착되고 있다. 문화 분야에서는 퐁피두 메츠 분관을 비롯해 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분관, 마르세유의 유럽과 지중해 문명사 박물관 분관 등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분관 건립 이전에 아까 말했던 것처럼 루브르나 파리 주요 미술관들의 컬렉션을 지방 도시에 장기간 대여하고 전시하는 프로젝트는 오래전부터 진행돼 왔다. 미술 분야 외에 공연 분야에선 지방 분권화가 뿌리 내린 지 오래다. 대표적인 예가 아비뇽 연극예술제다.”

-퐁피두 메츠가 구겐하임 빌바오와 같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퐁피두 메츠의 첫해 관람객 수는 구겐하임 빌바오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다. 오늘날 공공 미술관의 성공을 이끄는 요인을 정확하게 무어라 꼽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하나의 미술관으로부터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의 복제판을 기대하지 않는다. 구겐하임 빌바오의 성공 신화는 당시 미술관의 건립이 특정한 시대와 장소, 역사, 상황 그리고 건축물의 디자인 등 모든 요소들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많은 도시가 빌바오를 벤치마킹했지만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 헤르포드에 프랑크 게리가 디자인한 마르타 미술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미술관의 연간 관람객 수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퐁피두 메츠가 정말 성공한 미술관이었는지는 아마 십 년 후쯤에나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나마 지금까지 이루어낸 자그마한 성공은 우리가 우리만의 고유한 역사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건축부터 다른 미술관과 확연히 다르고 전시 역시 매우 다르다. 오늘날 공공 미술관의 성공은 특정한 ‘정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내 질문은 퐁피두 메츠가 구겐하임 빌바오와 같은 파급효과를 창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빌바오의 경우 수천억대의 예산이 투입됐다. 공항도 새로 짓고 역도 새로 지었다. 메츠와 로렌 지역의 투자는 빌바오시 전체의 투자에 비하면 매우 미미하다. 기차역을 새롭게 꾸민 정도? 경제 규모로 볼 때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스케일의 프로젝트다. 따라서 이 둘의 파급효과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물론 퐁피두 메츠의 파급효과만 본다면 그 나름대로 효과가 크다. 예를 들면 메츠의 관광객이 퐁피두 개장 이후 40% 증가했다. 하지만 빌바오처럼 공항이 북적거릴 정도로 많은 수의 관광객이 몰려오는 것은 아니다.(웃음)”

-외국인 관람객도 많이 왔나.
“대부분이 프랑스 관람객이다. 통계에 따르면 85%가 프랑스인이었고 그중 80%가 로렌 지방 사람들이었다. 외국인 관람객은 아직 15%에 불과하지만 퐁피두 메츠의 존재가 좀 더 널리 알려지면 늘어날 것으로 본다. 이 기사가 나가면 한국 관람객도 늘지 않겠나?(웃음)”

-그렇겠다. 문화 도시 메츠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불공평하게도 메츠는 그동안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가진 도시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봐서 알겠지만 메츠는 멋진 건축물로 이뤄진 아름다운 도시다. 17세기부터 내려오는 건물들과 유서 깊은 국가 유산, 도시 곳곳의 녹지대가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메츠 성당은 프랑스 내 가장 웅장한 성당 중 하나다. 또 유서 깊은 박물관들도 산재해 있다. 나는 퐁피두 메츠가 문을 열게 되면서 사람들이 퐁피두 메츠를 발견함과 동시에 메츠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최선희씨는 런던 크리스티 인스티튜트에서 서양 미술사 디플로마를 받았다. 파리에 살면서 아트 컨설턴트로 일한다.『런던 미술 수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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