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제패 미국 로봇 ‘한국 피’ 흐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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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텍의 데니스 홍 교수가 올해 로보컵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성인형 부문에서 우승한 ‘찰리-2’와 어깨동무를 한 채 팝콘을 먹고 있다. 찰리-2는 키 1m40cm의 로봇이다. 한국 작가 엄윤설씨가 외관을 디자인했다. [버지니아텍 로멜라연구소]


이달 10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엑스포센터. 올해로 15회째를 맞은 세계로봇월드컵(로보컵) 종목별 결승전이 치러졌다. 그중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휴머노이드(Humanoid·인간형 로봇) 성인형(키 1m30㎝ 이상) 경기. 미국 버지니아텍의 ‘찰리(CHALI)-2’와 싱가포르폴리테크닉의 ‘로보에렉투스(Robo Erectus)’가 아슬아슬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경기는 결국 1-0 버지니아텍의 승리로 돌아갔다. ‘찰리-2’는 각 팀 리더들이 투표로 뽑는 ‘베스트 휴머노이드’상까지 받았다. 버지니아텍은 앞서 열린 아동형 결승전에서 ‘다윈(DARwIn)-OP’ 로봇으로 일본 지바(千葉)공과대의 ‘CIT 브레인스’를 8-0으로 대파한 것을 포함, 이 대회 3개 부문을 휩쓸었다.

 일본·독일이 독점해온 로보컵 휴머노이드 경기에서 미국팀이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 언론은 “기념비적인 승리”라며 이 소식을 크게 전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미국 로봇 ‘찰리-2’와 ‘다윈-OP’의 몸속에 한국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대회 우승을 이끈 사람은 데니스 홍(Dennis Hong·한국명 홍원서·40) 버지니아텍 교수다. 그는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대학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지난 3월 세계적인 지식축제 TED 콘퍼런스에 첫 한국인 강연자로 나서기도 했다. <본지 3월 2일자 3면>

 그의 지도 아래 ‘찰리-2’ ‘다윈-OP’ 두 팀 리더를 맡은 사람도 한국인 한재권씨다. 고려대 기계공학과(학·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버지니아텍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씨가 홍 교수 연구소에 들어갈 때 포트폴리오(작품)로 제출한 ‘변신 자동차 로봇’ 동영상은 유튜브(www.youtube.com/watch?v=zK8OjwMdn5I)에 올라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현재 200만 회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버지니아텍 로봇팀의 리더인 한재권씨가 성인형 휴머노이드 ‘찰리-2’가 슛하는 장면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아동형 로봇 ‘다윈-OP’의 경기 장면. 골대를 향해 등을 보이며 공격하고 있는 3대의 로봇이 ‘다윈-OP’ 팀이다. [버지니아텍 로멜라연구소]


 ‘찰리-2’는 빼어난 외모로 대회 참가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영화 ‘아이, 로봇(I, Robot)’에 등장하는 로봇 ‘NS-5’와 닮았다는 평이 많았다. 역시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작가 엄윤설씨가 디자인했다.

 ‘다윈-OP’의 경우엔 태생부터 ‘반(半) 한국산’이다. 한국 로봇기업 로보티즈(ROBOTIS)가 버지니아텍과 공동 개발한 플랫폼(Platform·기본 뼈대)을 사용했다. 축구용 소프트웨어는 버지니아텍과 연합팀을 이룬 미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이 개발했다. 지도교수가 한국계 미국인 대니얼 리(Daniel Lee) 박사였다.

 홍 교수와 리 교수는 앞서 여러 로봇 경진 대회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경쟁자였다. 하지만 ‘고수’는 ‘고수’를 알아봤다. 한국이라는 공통분모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강점이 있는 분야를 나눠 맡아 시너지 효과를 높이기로 했다. 그 첫 실험 무대가 이번 대회였고 대성공을 거뒀다.

 리 교수팀에서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개발을 주도한 사람 역시 한국인 이승준씨다. 미 언론에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생으로 소개됐지만, 사실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박사과정 학생이다. 2009년부터 방문 연구원(visiting scholar) 자격으로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일하고 있다. 이씨는 “다른 팀 로봇과 달리 걷는 도중 공을 찰 수 있도록 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한 것이 주효한 것 같다”고 우승 비결을 밝혔다.

 홍 교수는 이번 대회 우승과 관련, “대중문화의 한류처럼 로봇 분야에서도 한국인들이 새 트렌드를 주도하는 ‘아카데믹 한류’를 보여준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로봇 한류’를 전파하는 데도 열심이다. ‘다윈-OP’ 중 ‘OP’는 ‘오픈 플랫폼(Open Platform·정보가 공개돼 있는 플랫폼)’의 약자다. 말 그대로 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든 설계도, 제작 매뉴얼 등을 공짜로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 로봇의 ‘씨’를 무료로 세계시장에 퍼뜨리는 것이다.

홍 교수는 “로보컵은 경쟁 대회지만, 더 중요한 목표는 이를 통해 로봇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라며 “우리가 개발한 플랫폼을 모두와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김한별 기자

◆로보컵(RoboCup)=1997년 시작된 세계 로봇 축구 대회. 일본 나고야(名古屋)대가 주축이 돼 만들어졌다. 한국 KAIST가 주도해 창설된 FIRA(세계로봇축구연맹) 로봇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로봇 축구계의 양대 산맥이다. 휴머노이드 외에 소형·중형(지름 50㎝ 이하) 로봇 등 다양한 종목이 있다.

우승 로봇 제원

▶ 찰리-2(성인형)

- 키 : 1m40㎝

- 무게 : 12.0㎏

- 걸음속도 : 초당 30㎝

▶ 다윈-OP(아동형)

- 키 : 45.5㎝

- 무게 : 2.8㎏

- 걸음속도 : 초당 24㎝

경기 규칙

▶ 성인형

- 경기장 규격 : 길이 6m, 폭 4m, 골대 폭 2m60㎝, 골대 높이 1m 80㎝

- 경기 시간 : 2분

- 공 : 국제축구연맹(FIFA) 규격 성인용 축구공(오렌지색)

- 공격 로봇과 상대편 골키퍼 로봇이 1:1 맞대결 / 주심이 휘슬 불면 공격 로봇이 볼 드리블해 슛

▶ 아동형(Kid Size)

- 경기장 규격 : 길이 6m, 폭 4m 골대 폭 1m50㎝, 골대 높이 80㎝

- 경기 시간 : 전·후반 각 10분(연장 전·후반 각 5분)

- 공 : 테니스 공(오렌지색)

- 골키퍼 포함 팀당 로봇 3대씩 3:3 맞대결오프사이드가 없는 것 제외하면 기본 규칙은 실제 축구와 유사

“로봇팀, 2050년엔 인간 월드컵 우승팀 이길 것”

데니스 홍 e-메일 인터뷰

로보컵 우승을 이끈 데니스 홍 미국 버지니아텍 교수는 “2050년까지는 로봇 축구팀이 인간 월드컵 우승팀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를 e-메일로 인터뷰했다.

 -우승 소감은.

 “로봇 대회의 황금률(golden rule)은 ‘하드웨어를 자주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플랫폼 안정화와 소프트웨어 개선에 주력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2007년부터 매년 새 로봇을 개발해 로보컵에 참가해 왔다. 다른 팀들이 ‘미쳤다(insane)’고 했지만 우리의 도전은 결국 성공했다.”

 -축구하는 로봇에 쓰이는 기술은.

 “기본적으로 설계·전자·제작 기술이 필요하다. 성인 크기 로봇을 만드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충분한 회전력과 스피드를 얻기 위해 무게가 가벼워야 한다. ‘찰리-2’의 경우 이를 위해 알루미늄과 함께 티타늄·탄소섬유화합물 등 하이테크 재료를 사용했다. 둘째, 두 발을 이용해 빠르게 걸으면서도 몸의 균형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찰리’같이 키가 큰 로봇에겐 쉽지 않은 과제다. 오직 소수의 그룹만 이런 기술을 갖고 있다.”

 -로보컵 출전 로봇들은 사람의 원격 조종 없이 스스로 축구를 한다. 원리는.

 “로봇이 주위를 ‘보고’ 자신이 본 것을 ‘이해’해야 한다. 카메라로 주위를 둘러보며, 어떤 것이 공이고 어떤 것이 골대인지 구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른바 ‘컴퓨터 비전 ’ 기술이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공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파악하는 기술(localization)도 필요하다. 다음으로 이런 정보를 종합해 자신의 동작을 결정하는 ‘생각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자동화 행동(autonomous behavior)’ 혹은 흔히 ‘인공지능’이라고 불리는 기술이다.”

 -축구는 단체 경기다. 로봇도 팀 플레이를 하나.

 “무선 인터넷(WiFi)을 이용해 서로 의사 소통을 한다. 가령 한 로봇이 공을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을 경우 다른 로봇이 대신 공의 정보를 알려주는 식이다. 골키퍼와 공격수가 각자의 위치에 따라 자동으로 역할을 교대하기도 한다.”

 -로보컵 목표는 2050년까지 실제 월드컵 우승팀(인간)을 이기는 로봇 축구팀을 만드는 것이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대단히 어려운 과제지만 할 수 있다고(doable) 생각한다. 로보컵의 목표는 실제로 인간을 이기는 것이라기보다 그런 수준으로 로봇 기술을 끌어올리자는 거다.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선 목표를 높이 잡을 필요가 있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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