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65) 세 남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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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서울 이태원 자택에서 촬영한 신성일 가족사진. 왼쪽부터 아들 강석현, 아내 엄앵란, 큰딸 강경아, 작은딸 강수화, 그리고 신성일. 작은딸 수화는 어려서부터 엄마의 판박이였다. [중앙포토]


서울 이태원 181번지는 우리 부부에게 귀한 선물을 주었다. 세 아이 모두 그 집에서 태어났다. 큰딸 경아(1965년생), 아들 석현(67년), 작은딸 수화(70년)다. 부모가 스타부부였고, 집이 ‘영화계 사랑방’이었으니 이보다 더 특수한 환경이 있었을까. 별별일이 많았지만 아들과 관련된 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석현이가 세 살 때였다. 나는 영화에 바빠 집안일을 잘 몰랐다. 20일 가까이 지방촬영을 마치고 귀가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3층 목욕탕에서 아들과 함께 목욕을 했다. 그런데 아이가 바싹 말라 있었다. 갈비뼈가 앙상했다. 그 전까진 포동포동했 는데…. 아들을 돌보는 가정부에게 물었다.

 “순이야, 애가 왜 이렇게 북한의 실정이냐?”

 ‘북한의 실정’이란 말랐다는 것을 뜻하는 당시 유행어였다. 순이가 머뭇머뭇 대답했다.

 “석현이가, 밥을 안 먹어요. 하루 종일 아이스크림과 콜라만 먹어요.”

 기가 막혔다. 아이스크림과 콜라는 아내가 영화 관계자들을 대접하려고 들여놓은 것이다. 냉동고도 장만했었다. 먹을 게 없어서 굶은 것도 아니고, 아이스크림과 콜라 때문에 아이가 그런 꼴이 되다니. 화가 치밀었다.

 “이제부터 애한테 아이스크림과 콜라 주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냉동고 없애버려.”

 하루 아침에 우리 집에서 아이스크림과 콜라가 사라졌다. 엄앵란은 반대했었지만, 내가 화나서 소리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울어댔다. 나는 밥 안 먹으면 차라리 굶기라고 했다. 사흘 동안 촬영장과 집을 드나들며 아이를 감시했다. 고집을 피우던 석현이는 결국 사흘 만에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부터 “미국 사람의 검은 물을 먹지 않겠다”고 했다. 특정상표를 지칭하지 않기 위해 콜라를 ‘검은 물’이라 한 것이다. 건강에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식품 아닌가. 난 그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1988년 미국 LA 사막 한복판 하이웨이에서 영화 ‘아메리카 아메리카’ 로케이션을 할 때조차 콜라에 눈길도 안 주었다. 식사로 햄버거와 콜라가 나올 땐 차라리 주스나 냉수를 마셨다.

 큰딸 경아는 65년 나와 엄앵란이 별거하면서 국민학교 입학 때까지 처가에서 자랐다. 외박이 너무 잦았기에 딸을 집에 데려다 놓으라고 주장할 입장이 아니었다. 묵인 아닌, 묵인이 돼버렸다. 외할머니는 경아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친할머니는 그에 비하면 애들을 이성적으로 대했다. 그런데 경아가 어느 날 혼자서 보따리를 주섬주섬 싸며 이렇게 말했단다.

 “할머니, 나 이태원 집에 갈래요. 데려다 줘.”

 경아는 자기가 리라국민학교에 입학하는 걸 알았다. 리라국민학교는 노란색 교복과 스쿨버스로 아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외할머니는 속으로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랐다고 한다. 아이란 자연히 부모 품에 안겨오는 법이란 걸 느꼈다. 아버지로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작은딸 수화는 어릴 적부터 엄앵란의 판박이였다. 어디서나 엄마 치마폭을 붙잡고 늘어졌다. 애 엄마가 귀찮아할 정도였다. 지금 애들이 의젓하게 자란 모습을 보면 언제 일이던가 싶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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