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간 주부 황규란씨, 1만5000원 수박 대신 4500원 오렌지 집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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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2일 서울 한강로동에 위치한 이마트 용산점 내 수입과일 매대에서 한 주부가 바나나를 고르고 있다. 이마트 측은 “올 들어 계속된 이상기후에 폭우까지 겹쳐 국내 과일값이 지속적으로 오르면서 수입 과일 매출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서울 아현동에 사는 주부 황규란(35)씨는 최근 홈쇼핑 방송으로 뉴질랜드산 키위를 구입했다. 가급적 수입산 과일을 먹지 않는 편이지만, 올해는 국산 과일값이 지나치게 오른 탓이다. 지난주에도 집 근처 대형마트에 갔다가 한 통에 1만5000원이 넘는 수박은 사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대신 한 망(6개입)에 4500원인 오렌지와 한 송이에 4000원인 바나나만 사왔다. 황씨는 “올해 3월에 사과 한 박스를 구입했던 것과 주말농장에서 수확한 방울토마토를 제외하면 올 들어 국산 과일을 거의 먹어보지 못한 것 같다”며 “대신 상대적으로 값도 싸고 가격 변동폭도 크지 않은 수입 과일을 먹게 된다”고 말했다.

 서민은 선뜻 국산 과일을 먹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수박 한 통 값이 1만5000원을 넘나들고 참외 10개에 2만원을 호가하다 보니 벌어지는 현상이다. 수박 가격은 지난해보다 35%, 참외는 46.9%, 천도복숭아는 3.1%(대형마트 기준) 오르는 등 대부분의 국산 과일값이 치솟고 있다. 반면에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맛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수입 과일들이 들어오다 보니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값이 싼 수입 과일을 찾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그 때문에 유통가에선 ‘부자는 국산 과일, 서민은 수입 과일’이라는 말도 나돈다. 실제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최근 소비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0.4%(참외)~68.3%(수박)가량이 비싼 국산 과일 가격과 수입 과일 같은 대체 과일 때문에 국산 과일 소비를 꺼린다고 응답했다.

 과일값 폭등 현상은 무엇보다 지난겨울 한파와 올 4~5월까지 이어진 이상 저온 탓에 국산 과일 출하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이 조사한 결과 수박의 6월 도매시장 입고량은 지난해 6월보다 11% 정도 줄었다. 포도 역시 올봄 냉해 피해로 생산량이 9%가량 감소했다. 여기에 이상 저온 현상 탓에 캠벨 같은 여름 품종의 출하가 늦어지고 있다. 참외도 이상 기후의 여파로 인해 6월 산지 출하량이 31.7%나 급감했다.

 과일 간 교체 사이클이 끊긴 것도 가격 상승의 한 원인이다. 수박이 비쌀 때면 참외나 복숭아 같은 대체 과일들이 나와야 하는데, 대체 과일들까지 출하가 미뤄지거나 생산량이 줄어들다 보니 과일 종류를 가리지 않고 동시에 가격이 오르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여름 과일인 복숭아의 경우 지난해보다 생육 속도가 일주일가량 늦은 것으로 나타났다.

 장마철 폭우도 악재로 작용해 과일별로 값이 지난달보다 10~20%가량 올라 소비자의 부담을 더했다. 장마는 그나마 안정세였던 채소값에 악영향을 줬다. 올해 4월 1㎏에 2703원이던 시금치는 이달 4505원에 거래된다. 석 달 사이 70%가량 값이 오른 셈이다. 연일 고공행진 중인 수박값은 원래 이달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노지(하우스가 아닌 일반 밭) 물량이 출하되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 수박 주요 산지들이 비 피해를 보면서 다음 달 초까지 값이 20%가량 오른 상태에서 거래될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형마트들은 국산 과일 재고를 떨어내기 위해 관행처럼 해오던 과일 판촉행사 횟수를 대폭 줄이거나 아예 진행을 하지 않고 있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여름 과일 재고물량 소진을 위해 통상 한 달에 2~3차례씩은 경쟁적으로 열어왔는데 올 들어 지금까지 국산 과일 세일행사는 단 한 번 여는 데 그쳤다”고 전했다.

 유통업계에서는 올해 추석(9월 12일)이 지나야 국산 과일값이 어느 정도 잡힐 것으로 보고 있다. 사과와 배 같은 국산 가을과일들이 본격적으로 나와야 일반 소비자들이 국산 과일을 마음놓고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하지만 추석이 예년보다 열흘가량 빨라서 추석용 과일선물세트(사과·배) 값은 여전히 예년보다 20~30%가량 비쌀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산 과일의 빈자리를 수입 과일이 빠르게 메우고 있다. 이마트가 지난 6월부터 이달 10일까지 과일 매출을 분석한 결과 수입 과일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8% 늘어나 전체 과일 매출 가운데 40.8%를 차지했다. 수박·포도 같은 국산 여름 과일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6월에 수입 과일 비중이 40%를 넘긴 것은 이마트가 과일매출 집계를 시작한 이래 처음이다.

 품목별로 오렌지는 37.3%, 수입 포도는 18.1%, 망고는 20.3% 매출이 커졌다. 수입 자몽은 50.8%나 매출이 뛰어올랐다. 수입 과일에 대한 소비자들의 거부감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마트가 6월 초 들여온 우즈베키스탄 체리는 행사 시작 하루 만에 수입물량(5t) 전체가 동이 났다. 이 회사 임영호 바이어(수입 과일 담당)는 “국산 과일의 가격이 급등해 소비자들이 쉽게 장바구니에 담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수입 과일을 선호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며 “과일 시장에도 양극화가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글=이수기·정선언 기자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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