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풍미한 여배우 문정숙씨 1일 타계

중앙일보

입력

"40년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감격스러워요."
1998년 12월 부천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여배우 문정숙(文貞淑)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무대 인사를 했다. 자신이 출연한 58년도 작품 〈종각〉(양주남 감독)이 특별 상영되는 것과 관련해 초청받은 문정숙씨는 여전히 멋쟁이 차림새였다.

객석을 채운 나이든 관객들은 "50, 60년대 한국 영화계를 풍미했던 여배우로서의 풍모가 여전하다"며 감탄을 금치못했다.

96년엔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에 출연, 식지않는 연기열을 보이기도 했던 문정숙씨가 1일 오후 10시 30분 간질환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세. 유족으로는 CF촬영 감독인 아들 장문기(48)씨가 있다.

작년 4월 서울여성영화제에서 고 이만희 감독의 딸이자 역시 배우로 활동하는 이혜영(38)씨와 만났을 때도 고인은 이혜영씨를 부둥켜 안으며 반가워했다. 한 때 이감독과 부부 사이기도 했던 고인은 혜영씨에게서 자신의 옛모습을 발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문정숙씨는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친근한 미소와 부드러운 눈매가 인상적인 배우로 남아있다. 특히 이감독의 〈만추〉에서 외출나온 여죄수 혜림의 캐릭터는 고인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회한과 애수어린 모습에 겹쳐지는 적극적인 여성상이 50년의 연기 생활에서 고인이 구축한 이미지였다.

27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고인은 보성 여학교에 다니던 17세에 연극 '왕자호동'에서 시녀역을 맡으면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52년 '양공주'의 어두운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신상옥 감독의 〈악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고인의 연기 세계는 이만희라는 능력 있는 감독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종각〉(유종남 감독) 등 초기 10여년간의 작품에서는 내성적이고 순응하는 전통 여인의 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감독을 만난 이후 〈마의 계단〉(64년)을 비롯, 〈검은 머리〉〈7인의 여포로〉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여성상을 표출해냈다.

98년 북한 인민배우인 언니 문정복씨가 고인이 보고싶다며 영상 편지를 쓴 것이 방송에 나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자매는 끝내 상봉을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문정복씨의 아들로 고인의 조카인 탤런트 양택조씨는 1일 밤 꼬박 빈소를 지켰다.

한편 영상자료원은 오는 6일부터 10일까지 고인을 추모하는 회고전을 연다. 이만희 감독의 〈검은 머리〉〈마의 계단〉(이상 64년작) 〈귀로〉(67년)을 비롯해 〈예라이샹〉(66년)등이 예술의전당 예술자료관 1층 시사실에서 매일 오후 2시 상영된다.
발인은 4일 오전 11시 경기도 고양시 벽제화장장. 02-590-2557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