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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친구” 자청한 원자바오, 그리스 사태 버팀목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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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원자바오 중국 총리

원자바오(温家宝·온가보·69) 중국 총리가 ‘유럽의 든든한 벗’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는 25일(현지시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그리스의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로화 표시 채권을 계속 매입·보유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원 총리는 이날 부다페스트 기자회견 자리에서 “중국은 유럽 국채 시장의 장기 투자자”라고 말했다. 이는 그리스가 단기적으로 디폴트를 선언하더라도 중국은 유럽 국채를 팔아치우지 않겠다는 말로 해석됐다. 영국 BBC방송이 중계한 화면 속 원자바오 표정에는 자신감뿐 아니라 인자함까지 비쳤다. 그는 “우리(중국)는 최근 몇 년 동안 유로존 회원국의 국채를 아주 많이 사들였다”며 “앞으로도 우리는 유럽과 유로화를 계속 지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자바오는 앞으로 유로 국채를 얼마나 살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의 발언은 중국이 그동안 추진한 외환보유액 다변화의 연장선으로 풀이됐다. 중국의 외환보유액 3조500억 달러(약 3324조원) 가운데 무려 3분의 2가 달러 표시 자산이다. 정치적 목적도 엿보인다. “중국이 미국과 경쟁하는 동안 유럽을 친구로 묶어 두려는 것”이라고 프랑스 르몽드지는 평가했다.

 발언 타이밍만 놓고 보면 원자바오의 정치적 목적은 100% 달성됐다. 그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장 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장 클로드 융커 유로 재무장관회의 대표 등은 그리스 구제작전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위기 당사국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2차 긴축과 민영화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 지도자들과 연쇄적으로 회동했다. 원자바오의 말이 유럽 사람들의 귀에 구원의 복음으로 들릴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원자바오가 이번 주 유럽 사람들의 발등에 떨어질 불을 꺼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이날 보도했다. 이번 주 그리스 사태는 분수령을 맞는다. 29일과 30일 그리스 의회는 2차 긴축법안과 민영화법안을 각각 표결처리한다. 그리스 정부는 정부 씀씀이를 줄이고 세금을 올려 400억 달러 정도를 조달할 예정이다. 또 국유 자산을 팔아치워 700억 달러를 마련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실업 사태와 더 심각한 경기침체일 가능성이 크다. 1차 긴축으로 그리스에선 일자리 40만 개가 사라졌다. 올 1분기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5.5% 수준이다.

 로이터통신은 “파판드레우 총리가 이끄는 사회당은 과반수보다 고작 5석 많다”며 “야당이 전원 반대하고 집권당 일부가 반발하면 2차 긴축과 민영화법안은 의회를 통과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긴축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반발은 거세다. 요즘 아테네에선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AP통신은 “그리스인 65%가 2차 긴축에 반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의원들이 경제 원칙을 내세우며 선뜻 긴축과 민영화에 찬성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희망적인 구석이 있기는 하다. 지난 22일 파판드레우 총리는 의회 신임투표에서 승리했다. 투표 결과는 155대 143이었다. 그날 “단 12표 차이로 파판드레우뿐 아니라 유로존이 벼랑 끝에서 소생했다”고 영국 BBC가 평가했다.

 긴축·민영화법안이 부결되면 이후 그리스는 디폴트를 향해 자유 낙하할 가능성이 크다. 유럽 재무장관들은 7월분 구제금융 171억 달러 지급 여부를 그리스 의회 표결 이후로 미뤘다. 이달 20일 회동에서 그들은 “그리스 의회가 2차 긴축·민영화법안을 통과시켜야만 다음 달 구제금융 170억 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못박았다. 유럽 재무장관들이 공언한 대로 7월분 구제금융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는 7월 만기 국채를 상환할 수 없다. 글로벌 시장은 긴축안 부결 순간 패닉에 빠질 수 있다. 유로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세계 자금이 급속히 안전 자산을 향해 이동할 수밖에 없다. 달러 가치와 미 재무부 채권 값이 뛰면서 국제 원유값은 더 곤두박질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 의회의 부결은 7월 3일로 예정된 2차 구제금융 논의에도 찬물을 끼얹는다. 이날 유럽 재무장관들은 1차 때와 비슷한 2차 구제금융 1550억 달러를 조성해 내년에 지급하는 방안을 의논한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그리스 의회의 투표함이 판도라 상자나 다름없다”며 “그 결과에 유럽 재정위기의 방향이 결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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