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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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여성은 점점 도태되어간다. (…) 표현에 나타나는 것으로만 보면 여학생이 늘어가고 졸업생이 많아간다. 그런데 왜 여성의 대부분은 점점 쇠멸(衰滅)의 구렁이로 기어들어 가는가. (…) 오늘의 모든 현상이 여성 그 자신이 그러한 길을 밟지 않으면 아니 되겠고 자포자기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게 만들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자아를 강경(强硬)히 살리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여성은 자살의 길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날 여성은 목에서 팔락거리는 목숨을 그대로 살리고 진정한 자아(眞我)는 죽이고 그대로 매매되어 타락의 구렁으로 들어간다.”(정숙(晶淑), ‘여성의 도태’, 『신여성』, 1925.11.)

 이 글이 실린 『신여성』 1925년 11월호는 ‘번민’을 화두로 하여 신여성들의 힘겨운 삶의 면면들을 두루 다루었다. 그중에서도 이들의 가장 큰 고충은 사회에 진입하기 어렵다는 것. 억지로 이를 시도하다가는 위의 글대로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한 채 매매와 타락의 길로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러한 현상을 위 글의 저자는 ‘여성의 도태(淘汰)’라고 표현했다.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극소수의 여성과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가 된 일부 여성을 제외하면, 1920~30년대 대부분의 중등학력 여성은 직업을 구하기 어려웠다. 아직 여성을 위한 직종 자체도 적었지만 중등학력을 요구하는 정도의 여성 사무 서비스직은 그 대부분을 일본 여성들이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소명, 2009). 그러니 교육과 사회 진출에 대한 열망으로 학교를 나와 봤자 대부분의 조선 여성들은 생존경쟁 속에서 남성과 일본 여성이라는 ‘위너(winner)’들에 의해 ‘도태’될 뿐이었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지상파 방송 3사의 월화드라마가 우연찮게도 모두 여성의 ‘거짓말’을 소재로 삼고 있다. 각각 학력을 위조하고(‘미스 리플리’·MBC), 나이를 속이고(‘동안미녀’·KBS), 상류층 남성과 결혼했다는(‘내게 거짓말을 해봐’·SBS) 거짓말을 한다. 이 여성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주류)사회로의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졸의 학력으로는, 서른네 살의 나이로는, 번듯한 남편이 없고서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거짓말을 한다.

 드라마의 완성도나 캐릭터의 설득력과는 별개로, 이것은 예사로이 넘길 현상은 아닌 듯하다. 즉, 이 드라마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누가 ‘루저’ 취급과 차별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과 같은 허무맹랑한 수단을 쓰지 않고서는 이 차별로부터 ‘구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금의 현실이 절망적임을 이 드라마들은 시사하고 있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