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칸과 프리드먼의 한국 청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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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곽재원
대기자

미국의 유력 싱크탱크인 허드슨 연구소의 설립자 허먼 칸(1922~1983)이 한국을 드나들며 조언해 주던 1970년대 초는 ‘로마 클럽’의 시대였다. 서유럽 지도급 인사들 모임인 로마클럽이 주도한 자원과 환경의 미래에 대한 최초의 국제적 연구가 72년 ‘성장의 한계’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발표되자 세계 각국 리더, 학자들의 관심이 일시에 ‘미래사회’로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 총책이었던 미 MIT대는 인구, 식량 생산량, 천연자원, 산업발전, 환경오염 등 5개 요소를 기초 데이터로 미래사회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했다. 미래학자와 미래전략가들의 대거 출현과 함께 2000년대를 향한 정책이 범람했다.

 그 중심에 서 있던 허먼 칸은 저서 『초대국 일본의 도전』(1970년) 에서 경제대국 후의 일본의 목표에 대해 일갈한 뒤 한국으로 관심을 돌린다. 그는 수차례의 방한 때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선진국 산업발전과정을 설명하면서 한국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주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 등을 그는 매우 높이 평가하고 한국이 10대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박영숙 유엔미래포럼 대표는 특히 새마을운동과 관련해 허먼 칸의 제자였던 제롬 글렌 밀레니엄 프로젝트 회장의 말을 인용, 허먼 칸이 박 대통령에게 미래 성장동력에 관한 다양한 제언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도시 노동자를 대신할 농어촌 노동력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고 밝혔다.

 허먼 칸이 앨빈 토플러 이전의 미래학 대가였다면 제롬 글렌 회장은 지금 기후변화와 녹색성장의 세계적인 전도사로 통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가 국내 석학을 총동원해 만든 ‘서기 2000년의 한국에 관한 조사연구’ 보고서(1970년)는 허먼 칸의 『2000년』(맥밀란 출판, 1967년)을 주요 참고문헌으로 삼았다. KIST의 녹색환경 연구도 70~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길주 KIST원장은 “KIST에 있어 녹색은 오래된 미래”라고 강조한다.

 미 뉴욕 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57)이 한국의 녹색성장을 얘기한 것은 ‘글로벌 코리아 2009’ 포럼에 참석해서다. 정보기술(IT) 혁명이 몰고 온 새로운 세상을 그는 ‘평평한 세계’라고 불렀고, 여기에 에너지기술(ET) 혁명을 가세시켜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라 정정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이 빈곤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녹색기술에 투자하면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며 “한국의 저탄소 녹색성장 정책은 지금의 한국에 가장 적합한 비전이라 본다”고 평가한 바 있다. 프리드먼은 2006년 10월 영국 정부의 수석경제학자 니컬러스 스턴 경이 기후변화를 사회경제학적으로 접근한 검토 보고서(이른바 스턴 보고서)를 발표한 이래 수많은 전문가가 등장하고 있는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녹색 오피니언 리더로 부상했다.

 영국 재무부의 위탁과제로 수행된 이 보고서는 세계가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지구온난화 대책 비용이 세계 GDP의 5~20%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고,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기후변화과학회의에서 스턴 경에 의해 다시 수정 발표됐다.

 이번 주(20~21일) 스턴 경을 포함한 세계 리더들이 참석하는 서울 글로벌 녹색성장 서밋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녹색성장 정책의 또 다른 기점이 될 것 같다. 지난 3년간 추진해 온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다시 추슬러 산재한 정책들의 결집력을 높이고, 사회·경제 각 부문 간에 녹색 차별(그린 디바이드)이 생기지 않도록 소통과 수용 환경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로마클럽 보고서-허먼 칸’ 시대를 지나 ‘스턴 보고서-토머스 프리드먼’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 40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의 녹색성장 정책은 그 연장선상에서가 아닌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미래를 설계하려 한다.

 허먼 칸이 70년대 설파한 한국의 도전과 대응은 이제 선진국에 대한 도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과거 업적에 대한 자부와 타국에 대한 자신감, 국가적 위신을 발양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다시 해석돼야 할 시점이다.

곽재원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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