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섣부른 ‘중국 위협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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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지난주 필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동아시아 회의에 연사로 참석하는 기회를 가졌다. 여기서도 초미의 관심사는 단연 중국 문제였다. 특히 남중국해의 난사(南沙)군도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면서 중국을 위협으로 보는 동남아 국가들의 인식이 하루가 다르게 공고해지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대화를 통해 현 국면을 타결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공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헨리 키신저는 최근 저서 『중국에 대해(On China)』를 통해 이에 일침을 가한 바 있다. ‘역사는 반복하는가’라는 제목의 결론에서 그는 1907년 영국 외무부 고위관리 에어 크로가 당시 독일의 부상과 영국의 대응책에 관해 기술했던 메모의 경직된 대독(對獨) 인식이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크로는 메모를 통해 ‘독일은 정치적 패권과 제해권을 모색하고 있으며 이는 영국에 대한 객관적 위협이므로 대영제국 존립과 양립할 수 없다’고 못박은 바 있다. 또한 독일 온건파 정치인들의 화해공존 움직임을 ‘패권 추구를 위한 위장전술’로 단정하면서 신뢰구축이나 협력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렸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미국에서 이러한 역사가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고 키신저는 우려한다. 그가 ‘크로 학파’로 명명한 워싱턴의 강경론자들은 ‘중국의 부상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미국의 패권적 위상을 훼손할 수밖에 없으므로 견제·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100년 전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뿐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결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게 키신저의 역설이다. 두 강대국은 앞으로도 가능한 한 협력하면서 갈등을 최소화하는 ‘공동진화(co-evolution)’의 길을 걸어가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예측은 우리에게도 중국 위협론의 실체를 다시 고민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중국이 미국에 도전하는 새로운 위협적 패권국이 되려면 능력, 의도, 지도자의 정치적 의지라는 세 박자가 고루 맞아떨어져야 한다. 과연 중국이 이 세 요소를 모두 충족하고 있는가. 다분히 회의적이다.

 먼저 능력을 보자. 국제통화기금(IMF)의 최근 예측대로 중국이 2017년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된다고 가정해도, 최대 수출국과 최다 외화보유국의 위상을 계속 유지한다 해도, 13억 명의 엄청난 인구를 먹여살려야 하는 처지에서는 여전히 개도국의 지위를 벗어나기 힘들다. 하물며 군사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은 나토 회원국을 포함해 60개 이상의 국가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지만 중국은 파키스탄 정도와만 동맹관계에 있을 뿐이다. 중국이 해외 주둔군을 바탕으로 세계적 차원에서 군사력을 투사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의도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 지도부는 여전히 화평발전, 화평굴기(和平<5D1B>起)를 대외정책의 기본 노선으로 삼고 있다. 인민들의 삶의 질 향상, 빈부·지역 격차 해소, 부정부패 척결, 자원 확보와 환경문제 해결 등 국내 문제가 최우선적 목표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평화, 대내적으로는 조화사회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국굴기를 표방하는 소수 강경파의 시각은 어느 잣대로 봐도 주류가 아니다.

 중국의 패권적(覇權的) 부상(浮上)을 추진할 만한 정치 지도자가 가까운 장래에 베이징의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까.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이후 관료형 지도자들로 구성돼 온 중국의 리더십은 나라의 명운을 도박판에 내던질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민주화 요구와 소수민족 문제, 사회 불안 등 내부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내부적 도전에도 불구하고 중국 지도부가 패권적 부상에 열을 올릴 수 있을지 극히 의심스럽다.

 이 같은 객관적 현실을 무시하고 소수에 불과한 강경파의 시각을 과대평가해 국제사회의 대(對)중국 압박이 강해지면, 이는 도리어 중국 내 군부 발호와 배타적 애국주의 확산이라는 위험한 도화선에 불을 댕기게 될 것이다. 섣부른 ‘중국 위협론’이야말로 중국을 진짜 위협으로 만드는 첩경인 셈이다. 이것이 100년 전 크로의 오류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이고, 키신저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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