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여친의 마지막 인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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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호 10면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아직 봄꽃이 한창이던 어느 날 아들의 여자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들의 여자친구는 문자 메시지를 자주 보내왔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는 날이면 꼭 문자를 보내온다. “오늘은 비가 온다니까 꼭 우산 챙기세요.” 날씨가 춥거나 황사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일교차가 심하대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황사가 심하다던데 마스크 잊지 마세요.” 시도 보내온다. 가령 한번은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아직 아무도 방문해 보지 않은 문장의 방문을 문득 / 받는 시인은 얼마나 외로울까, / 문득 차 안에서 / 문득 신호등을 건너다가 / 문득 아침 커피를 마시려 동전을 기계 속으로 밀어넣다가 / 문장의 방문을 받는 시인은 얼마나 황당할까? - 허수경, ‘문장의 방문’ 중에서. 아직 아무도 방문해보지 않은 문장의 방문을 받는 하루 보내세요.”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아들의 여자친구가 다니는 영어학원이 마침 사무실과 가까워서 안 그래도 언제 저녁이라도 사주려던 참이었다. 우리는 뭘 먹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닭볶음탕을 파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나는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의 안부를 묻고 군에 있는 아들 흉을 보기도 한다. 무뚝뚝하고 멋없는 녀석이라고. 아들의 여자친구는 콜라를, 나는 반주로 소주를 곁들인다. 반 병쯤 마시자 살짝 취기가 오른 탓인지 나는 허세를 부린다. 겨우 안면이 있는 정도의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친한 척 통화한다. 마치 시인에게 초청이라도 받은 것처럼 나는 시 낭송회 행사 때 데려가겠다고 약속한다.

식사를 마치고 버스 정류소에서 헤어질 때 아들의 여자친구는 내게 쇼핑백 하나를 건넨다. 전통차라고, 건강에 좋을 거라고, 비싼 거 아니라고. 아들의 여자친구가 굳이 우겨서 내가 먼저 버스에 탄다. 어정쩡하게 서서 차창으로 보는 내게 아들의 여자친구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영원한 사랑이 이상적이라면 한때의 사랑은 일상적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했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말과 달리 사랑은 어떻게든 변한다. 끝난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것이다. 그건 어느 한쪽이 나빠서도 잘못해서도 아니다. 낮이 지나면 저녁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는 것처럼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아들이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한동안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얼마 전 아들과 통화하다가 여자친구 이야기를 했더니 이미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문자가 없었다. 우산 없이 나갔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만난 적도 있었다. 딸이 없는 우리 부부에겐 딸 같아서 좋았는데. 아쉽고 서운해도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아들의 여자친구는 그날 마지막 인사를 한 것인데 눈치없는 내가 시 낭송회 가자는 약속까지 한 것인지 모른다.

얼마 전 우연히 아들의 여자친구를 보았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기타를 등에 멘 아들의 여자친구는 학원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고르는 눈치였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서먹한 인사를 짧게 나누고 헤어진다. 각각 “누구야?” “누굽니까?”라고 묻는 친구들과 동료들에게로.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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