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정의,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그럴듯한 ‘발명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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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폴 리비어의 판화 ‘ 보스턴 대학살 ’. 1770년 3월 5일 영국 식민지 정부의 과도한 세금정책에 반대해 봉기한 보스턴 주민과 영국군 사이에 벌어진 충돌을 그렸다.

정의의 역사
데이비드 존스턴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360쪽, 1만5000원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도 변한다. 뿐만 아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돌멩이를 던지지 않고 말을 건넸을 때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했듯이 정의도 사유재산의 발생과 더불어 ‘발명’됐다.

 이 책은 원제 ‘정의에 관한 짧은 역사(A Brief History of Justice)’처럼 인류가 정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 궤적을 보여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지은이는 이를 위해 기원전 3000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20세기 정치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까지 들춰냈다.

 지은이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이전의 정의란 재산권 보호를 뜻했으며 그 수단은 보복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기준은 상호성으로 이었다. 이른바 ‘눈에는 눈’이 그 원칙을 상징한다. 당시의 정의구현은 권력과 부의 엄격한 서열과 정치 및 사회질서 유지가 목적이었다. 평등이란 개념은 정의와 무관했다.

 정의의 일차적 목표는 각 개인의 내면에 어떤 질서를 배양하는 것이라고 정의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다. 국가가 흉악범을 처벌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러나 도덕에 가까운 이 정의의 개념엔 역시 평등이 빠져 있었다. 오히려 사람마다 재능이나 자질이 불평등하다는 전제하에 각 계급이 간섭하지 않고 자기 계급의 일에 열중하는 것을 정의롭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플라톤은 농민·장인·전사·철인통치자 등 계급을 구분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정의는 폴리스에 국한되었다. ‘야만인들’과의 관계에까지 적용되는 ‘보편적 정의’가 등장하려면 로마제국과 기독교를 기다려야 했다.

 18세기 들어서야 능력이야 어떻든 인간은 모두 똑같은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정의의 문제에서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이마누엘 칸트를 대표주자로 하는 이 사상에 이어 영국 사상가 벤담이 정의의 기준으로 종래의 상호성을 배제하고 사회 전체의 행복이란 공리성을 제시했다.

 18세기 후반부터 기근과 아사가 만연하면서 19세기에 정의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나타났다. 사회정의가 떠오른 것이다. 생시몽 등은 사람들이 자신이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한 것과 같은 가치의 것을 받을 때 정의가 실현된다는 ‘공과의 원칙’을 내세웠고 이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 필요의 원칙으로까지 나아갔다.

 책은 쉽지 않다. 5000년에 걸친 사상의 흐름을 따라가려니 자연히 발이 꼬인다. 서양 사상에 한정되긴 했지만 그래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거의 모든 부는 사회적 산물이라는 아담 스미스의 시각, 인간이 평등하다고 해서 소유까지 평등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칸트의 주장,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롤스의 ‘차등의 원칙’이 그것이다. 몇 십억 짜리 호화주택 또는 몇 십 채의 집을 가진 사람과 노숙자가 공존하는 사회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지난해 우리사회 화제가 됐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와 나란히 읽어볼 일이다.

김성희(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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