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5,000개 시대' 특별 좌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국내 민간연구소가 5천개를 넘어선다. 최근 벤처 기업의 연구소 설립 붐에 따라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등록 민간연구소가 5천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민간연구소의 양적 팽창과 함께 연구 풍토도 급변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기술〓경영' 인 시대, 중진 연구소장들을 초청해 우리 연구소들이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를 짚어보는 좌담회를 마련했다.

-김:국내 민간 연구소 5천개 돌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한:양적이나마 기술 개발의 터전이 마련됐지만 이제는 질적 성장에 주력할 때가 됐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국내 연구소들이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등 소수 분야를 빼고는 핵심기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기술 의존도가 큰 하이테크산업이라면 매출액 대비 연구비를 최소한 5% 이상 투자해야 질적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봅니다.

-김: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선 원천핵심기술 개발에 주력해야한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는데요.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창:대학과 기업의 긴밀한 연구협력이 필요합니다.예컨대 삼성·현대·엘지등 그룹이 공동으로 대학에 연구비를 대고 연구결과를 나눠 갖는 것입니다.기술의 상용화는 경쟁을 해가면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정부는 이런 종류의 연구에 세제 혜택을 줌으로써 기업과 대학의 연구 중매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한:민간 연구소는 벤처 붐에 따라 급증한 측면이 있습니다.대학과 기업이 연구협력을 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교수나 학생들이 돈 번다는 생각으로 들뜨면 곤란합니다.장래를 위한 원천 핵심기술중에는 10년 정도는 개발해야 나오는 기술들이 있는데 벤처 붐때문에 흔들리면 안될 것입니다.

-김:국제통화기금(IMF)체제 진입 이후 연구인력이 대폭 감축되는 등 연구력에 구멍이 생긴 게 아닙니까.

-양:많이 줄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연구인력에 손대지 않은 기업도 적지 않습니다.연구소가 늘어나는 것은 기업 생존에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는 반증입니다.연구개발이 장래를 위한 투자라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뜻이지요.

-창:IMF로 연구계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연구에도 효율성이 강조됐습니다.또 연구원 개개인으로는 기술의 사업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계기가 됐습니다.IMF이전만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만 한다는 생각이 강했거든요.

-김:선진 연구동향을 전해주는 기업의 해외 연구소들이 적지 않게 폐쇄돼 기술 개발에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도 들리던데요.

-양:숫적 감축 보다 운영 철학이 달라지고 있다고 봐야합니다.현장 중심으로 연구소를 운영하면 현지인들이 선호하는 상품 개발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술을 이전받기 쉽습니다.미국 IBM이 스위스 현지 연구소를 운영하며 노벨상 과학자를 배출한 것은 철저히 현지에 충실했기 때문이지요.

-김:재벌 개혁으로 그룹의 연구개발 조정 능력이 위축된 측면은 없었나요.

-창:같은 재벌내 기업들이라도 연구소장끼리 또는 연구소 차원에서 협의체가 있습니다.중복투자나 불필요한 경쟁은 없습니다.다만 과거에는 그룹차원에서 꼭 필요하다면 힘을 실어주는 연구가 있었는데 이런 힘은 좀 떨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양:그룹내 특정 연구소를 그룹 차원에서 도와주면 계열사에 대한 편법 지원으로 비쳐질 수 있지요.미국에선 큰 회사들이 20∼30년 앞을 내다보고 연구합니다.국내 1개 회사가 이런 연구를 하기는 힘듭니다.법을 보완할 측면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창:연구차원에서 지주회사 도입은 긴요합니다.예컨대 미국의 GE는 모든 특허를 중앙에서 집중관리 합니다.이 때문에 예를 들어 엘지전자가 GE와 특허분쟁을 벌이면 당해낼 수 없습니다.이런 때 엘지화학 특허를 그룹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다면 GE에 대한 협상력이 높아질 수 있는데 우리는 어렵습니다.

-김:벤처기업들이 연구소 5천개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하지만 한편으로 생명공학·초전도 등 국가적으로 긴요한 장기기술개발 과제를 소홀히 하는 분위기도 있는데.

-창:우려가 됩니다만 이러한 열기는 바람직합니다.최근 연구는 스피드 경쟁입니다.대기업 연구소들도 속도를 중시하는 벤처기업 혹은 벤처 연구소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대기업도 이런 물결을 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물론 내용없는 기술을 과대 포장하는 것은 피해야하지만요.

-한:벤처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선진국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습니다.분명한 것은 강철도 만들어야 하고 자동차와 좋은 의약품도 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원천 기술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양:대기업이 벤처를 기업으로 키우고,전문적인 관리 노하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이러려면 벤처에 대한 대기업의 지분 한도를 현재의 20% 보다 상향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대기업과 벤처기업이 우리 경제의 쌍두마차라는 표현을 김대통령이 한적이 있습니다.벤처와 대기업의 관계 설정이랄까,기술 협력이랄까요,어떻게하면 좋겠습니까.

-한:1990년대초 미국 AT&T 알렌 회장은 한번에 수백개 벤처 기업에 투자해 관심을 끌었습니다.통신 기술이 어느 쪽으로 발전할 지 감을 못잡겠으니 여러 곳에 투자해 그 중 몇개만 건져도 성공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우리 대기업도 요즘 벤처에 이런 식의 투자방향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선진국의 유명 기업연구소를 보면 기초연구에도 힘을 쏟는데 우리 대기업들은 기초 기술의 일방적 소비자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양:기업이나 대학이나 기술 개발쪽에서는 헛점이 많았습니다.기업이 자체적으로든 아니면 대학이나 국공립연구기관과의 협력으로든 원천 특허를 확보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파생특허에 비하면 원천특허는 수천·수만배 이상의 효과를 발휘합니다.학술적으로 따지면 노벨상과 같은 것이지요.

-김:연구계에서도 기업간 전략적 제휴가 바람직하지 않을까요.예컨대 기업간 특허교환(크로스 라이선싱)으로 서로 개발비용을 줄임으로써 경쟁력을 확보하는 등 방안이 나와야 할 거라는 생각인데요.

-한:미국에서는 강력한 반독점 금지법에도 불구하고 동종 기업간에 특허교환이 빈번하게 이뤄집니다.우리도 이게 꼭 필요한데 기업문화가 현대맨,삼성맨 등으로 너무 폐쇄적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창:삼성과 엘지가 LCD 분야에서 합치면 세계 넘버원이고 삼성·현대가 반도체에서 합치면 역시 세계 최고입니다.이제 경쟁은 안이 아니라 밖이지요.물밑에서 이미 이런 협력이 일어나고 있으니 머지않아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양:소재나 부품 분야에서 이런 협력이 진행중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특허 교환 등이 활발하려면 서로 내놓고 받을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김:정부가 기업의 연구 활성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한:두가지 입니다.연구개발과 관련해서 세액공제를 실시해야 합니다.또 연구원 개개인의 인센티브에 대해서 세금을 징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국공립연구소 연구원들에 대해서는 현재 근로소득세 면세가 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민간연구소 연구원에게도 비슷한 혜택을 줘야합니다.법관이나 의사도 국가에 긴요한 존재지만 연구원도 그 못지 않은 자원입니다.국가가 이를 유도해야 한다고 봅니다.

-창:연구원에 스톡 옵션을 줄 때 시가보다 훨씬 싸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또 현재 병역특례제도는 개선돼야 합니다.병역특례를 악용한 기업간 연구인력 이동 등으로 안정적 연구인력 확보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아예 석사학위자에게는 모두 6개월 훈련을 받도록 하는 등 제도를 개선하면 어떨까요.

-김:장시간 감사합니다.민간 연구소 5천개 돌파라는 양적 확대가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도록 정부나 민간 모두 힘써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리=김창엽기자

<참석자>
김한중(고등기술원 원장)
김창수(LG종합기술원 원장)
양덕주(삼성종합기술원 부사장)

◇ 사회 : 김종범(국민대 사회과학부 학부장.과기정책학)

◇ 장소 : 서울 포스코빌딩 4층 응접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