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경영혁명] 'N세대' 사원이 임원 가르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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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오후 1시 서울 논현동 ㈜한국소프트중심 회의실. 캐주얼 복장의 20대 젊은이가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며 ''무선 인터넷 서비스''에 대해 설명하자 30~40대 수강생 15명이 강의내용을 열심히 받아적는다.

"2004년이 되면 유선보다 무선 인터넷 접속이 더 많아집니다. 휴대폰으로 소프트웨어를 내려받는 시대가 곧 옵니다. 이때 우리 회사에는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요?"

강사는 지난해 12월 입사한 서민택(27) 씨. 수강생은 부장급 이상 간부다. 서씨 등 이 회사 신입사원 6명은 매주 돌아가면서 간부들에게 인터넷.멀티미디어 콘텐츠 등을 교육시킨다.

인터넷시대 벤처열풍이 기업 풍속도를 바꿔가고 있다. 권위와 복종 대신 자유롭고 창의적인 정신을 강조하는 ''벤처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복장 자유화는 이미 옛말이 됐으며 과장.부장 호칭이 사라지고 소모임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는 네트워크 문화가 크게 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유한수 전무는 "생산성을 높이고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식이 대기업에도 확산되고 있다" 며 "특히 경영자가 젊거나 해외경험이 많은 기업에서 급격한 문화충격이 발생하고 있다" 고 말했다.

◇ 벗어던져야 거듭 난다

16일 경기도 용인 삼성인력개발원에서는 DDR 및 스타크래프트 경연대회가 열렸다. 참가선수는 올해 삼성그룹 임원으로 승진한 1백75명. 지난 15일에는 동대문시장도 방문했다.

모두 신규임원 교육과정 중 하나다. 삼성측은 "신세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급변하는 경영현장 체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교육내용을 확 바꿨다"고 말했다.

그래픽 머드게임 ''바람의 나라'' 로 유명한 넥슨 직원들은 과장.부장이란 호칭을 쓰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띵'' ''소마'' ''성냥'' 등 특이한 별명으로 부른다. 심지어 사장을 부를 때도 ''사장님'' 이 아닌 e-메일 ID ''제이''라고 한다.

이 회사 김정주 사장은 "학력.경력에 관계 없이 능력을 중시하는 벤처기업 특성상 직급으로 아래.위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재교 대리는 "ID나 별명을 이름 대신 부르기 때문에 직원들의 이름을 모르고 지내는 경우도 있다" 고 말했다.

제일제당도 올초부터 서로를 부를 때 직급을 붙이지 않는다. ''상무님'' ''전무님'' 대신 이름 끝에 ''님'' 자만 붙인다. 김태주 상무는 "전체보다 개인이 중요해진 벤처형 기업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라고 설명한다.

PC통신 유니텔은 3월부터 직급과 승진제도를 없앨 계획이다. LG텔레콤에서는 개발실 등 아이디어가 중요시되는 부서 직원들은 양복 대신 평상복 근무를 한다.

삼성SDS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매일 하던 아침회의를 올들어 없앴다. 반복적인 회의로 인한 업무 비효율성을 막기 위해서다. 회사 지시사항이나 공지사항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던 회의는 e-메일로 대체됐다.

라이코스코리아에는 공식적인 회의가 없다. 업무시간 중인 오전 9시~오후 6시 사이에는 회의를 않는 것이 철칙이다. 보통 e-메일로 업무협조나 의견을 교환하지만 꼭 해야 할 회의가 있을 땐 오후 6시 이후에 한다.

◇ 정보공유형 네트워크가 생긴다

벤처문화 흡수를 위해 벤처기업과 대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토론모임이 늘고 있다.

이코퍼레이션의 김이숙 사장이 주도하는 e-CEO 클럽에는 벤처기업인은 물론 김영일 현대백화점 고문.신현우 옥시 사장.백각종 쌍방울 사장 등 기존 기업 경영인들이 대거 참여한다.

SK그룹은 매달 한차례 열리는 벤처기업인들의 모임인 한국벤처포럼에 계열사 경영진을 참여토록 하고 있다. SK측은 "경영진의 벤처기업의 경영방식과 기업문화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 테헤란로 일대에는 벤처리더스클럽.IB리그.한국웹마스터클럽(WMC) .말금회.이브.인터넷마케팅포럼(IMF) 등 20여개 모임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소규모 모임까지 합치면 수백개에 달한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 직장내 문화충돌도 문제

신세대 직장인들이 늘어나면서 연공서열이 무너지는 한편 기존 세대와의 부조화도 적지않다.

전경련 유한수 전무는 "경험이 중요시됐던 아날로그 경제에서는 연장자가 우대받았으나 디지털 경제에서는 능력이 우수한 하급자도 속출하는 등 상명하복이 흐려지고 있다" 고 말했다.

기존 기업문화에 대한 신세대들의 불만도 적지 않다.

삼성그룹 신입사원 토론회에서는 "패기.끼있는 인재를 뽑는다고 해서 왔는데 실제 현업에서는 말 잘 듣는 사원을 편애한다" "신세대들은 내가 하고픈 일을 하는데 가치를 두지만 회사측은 승진이나 급여에만 관심을 갖는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이들은 또 타파해야 할 관행으로
폭탄주
양 많은 보고서
근무시간중 인터넷 검색에 대한 편견 등을 꼽았다.

한국능률협회 종합연구소 김종길 박사는 "대기업의 경우 간부들의 의식.학습수준이 인터넷 발달 등 주변환경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이 많이 발생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율을 중시하는 벤처형 기업문화가 정착될 것"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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