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26) 자생력 갖게 된 우리금융지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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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우리금융지주는 출범 2년 반 만에 뉴욕증시 상장이란 목표를 이뤘다. 윤병철 초대 회장(가운데)이 2003년 9월 29일 뉴욕증권거래소 벨 데스크에서 우리금융지주의 상장을 알리는 벨을 누르고 있다.


2003년 9월 29일 오전 9시30분. 뉴욕증권거래소 벨 데스크에 선 나는 뉴욕증시의 개장을 알리는 종을 힘차게 두드렸다. 증시 개장과 함께 우리금융지주의 상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국내 금융회사 가운데 세 번째 뉴욕증시 상장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간 겪었던 온갖 험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자리에 함께 선 우리금융 임원들 역시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거래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내가 주식 10주를 매입했다.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맡아 처음 밑그림을 구상할 때부터 어떻게 해야 ‘부실 덩어리’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정상화되었다는 객관적 신인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1차 목표는 국내증시 상장이었다. 하지만 국내 상장만으로는 미흡했다. 엄청난 공적자금 투입이란 국민적 부담을 덜고 경영 정상화에 대한 국제적 신인을 얻기 위해서도 최종적으론 뉴욕증시에 상장시키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뉴욕증시 상장은 재무건전성과 회계투명성에 대한 엄격한 상장심사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은 일이다. 실무적으로도 미국의 회계기준에 맞게 과거 3년치 연결재무제표를 새로 작성해야 했다. 감사비, 변호사비, 자문비, 발행 수수료 등 총 600만 달러가 드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우리가 뉴욕증시 상장 의지를 밝히자 전문가들의 의견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한 회계법인 대표는 “뉴욕증시 상장은 돈만 들고 안 된다”고 했다. 금융계 원로들도 “공적자금이 들어간 금융기관에서 괜한 돈을 낭비한다. 불가능한 것을 왜 시작하느냐. 시작했다가 상장도 못하고 중도에 주저앉게 되면 창피만 당한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뉴욕증시 상장은 우리금융지주의 건전성을 시장에서 인정받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또 회계 부분에서 남들보다 한 발 앞서 글로벌스탠더드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신용평가를 받는데도 매우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해 그대로 밀어붙였다.

 우리금융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편입된 은행들이 가진 부실자산을 털어내는 게 시급했다. 부실자산을 빨리 팔아서 현금화해야 하는데 은행들은 이를 싫어했다. 부실자산을 털고 나면 장부상으로 손해가 드러나고 실적이 나빠지면 인사와 급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은행이 소극적이니 지주회사가 부실자산을 사들이기로 했다. 문제는 돈을 구하는 일이었다. 국내에선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당시 재무담당 부회장(CFO)이었던 민유성씨가 해외자금 유치에 나섰다. 지주회사가 가진 기채한도를 지렛대로 활용해 일단 UBS에서 9억5000만 달러를 빌려 왔다. “부실자산을 정리합시다. 은행이 못 팔면 우리가 사겠소.” 돈이 있으니 지주회사가 은행에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다.

 이 자금만으로 거대한 부실을 털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로부터 8억 달러의 투자를 받아 합작회사를 설립함으로써 부실자산을 처리할 수 있었다. 부실을 털어냈기에 우리금융의 국내 증시 상장과 뉴욕증시 상장이 가능했다.

 능력 있고 사명감이 강한 전광우·민유성 두 부회장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들 덕을 많이 봤다. 지금도 두 사람을 포함한 당시 지주회사 임원들과는 ‘이목회’를 만들어 한 달에 한번쯤 만난다. 가끔 예전 일을 회고한다. “그때 고생 많이 했나 봐요.” 언젠가 이목회 부부동반 모임에서 집사람이 그렇게 얘기했다. 그래도 그때 우리는 고생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나는 2004년 3월 3년 임기를 마치고 우리금융지주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애초에 내가 회장 공모에 나선 것도 아니고, 정부가 날 필요로 해서 데려갔던 자리였다. 연임은 생각지도 않았다. 더 이상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내가 떠날 때 노무현 정부의 정찬용 인사수석이 점심을 사면서 “수고 많았다”고 인사했다.

 12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국내 최초의 금융지주회사는 불과 3년 동안 적잖은 성과를 이뤘다. 총 12조7000억원의 영업수익을 올렸으며, 부실자산을 정리하고 건전화하는 데 7조2000억원을 썼다. 순이익은 1조3000억원을 남겼다. 자기자본은 4조1000억원에서 5조5000억원으로 늘어났고, 총자산 역시 30조원 가까이 늘었다. 비관론이 가득한 가운데 시작한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건전성과 수익성 면에서 모두 성공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모든 것이 우리금융그룹 구성원들이 애쓴 결과라는 점에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낀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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