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35) 공미도리(孔美都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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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한·일 친선 패션쇼 관계로 서울을 방문한 일본 패션모델들과 함께한 재일동포 여배우 공미도리(맨 오른쪽). 신성일과 혼담이 오갔던 상대였다. [중앙포토]


청춘스타로 주가를 떨칠 무렵 맞선 상대가 나타났다. 재일동포 여배우 공미도리(孔美都里)다.

 1963년 여름, 나는 몸이 두 서너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 이 때 일본인 여인과 한국인 남자의 사랑을 다룬 ‘현해탄의 구름다리’ 출연 제안이 들어왔다. 공미도리가 여주인공을 맡았다.

 ‘현해탄의 구름다리’는 한운사 작가의 라디오 드라마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가 원작이다. 원작 드라마는 크게 히트했다. 일본으로 끌려간 학도병 아로운이 얼마나 사랑을 받았던지…. 아로운을 괴롭히는 악질 일본헌병 역의 이예춘(이덕화 아버지)을 미워하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아로운 역의 김운하는 내 또래의 라이벌 배우였지만 나약한 이미지를 벗지 못해 영화배우로 대성하진 못했다. 공미도리는 아로운을 동정하는 여인 히데코 역으로 나왔다.

작가 한운사(左), 배우 이예춘(右)

 한국예술영화사가 공미도리를 두고 기획한 작품이 ‘현해탄의 구름다리’였다. 촬영은 내 스케줄에 맞춰 이뤄졌다. 초반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촬영을 했다. 공미도리는 우리 말도 서툰 데다 촬영 날을 빼면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그 때 말상대가 된 사람이 일본말에 능통한 내 어머니였다.

 공미도리는 촬영이 없는 날이면 우리 집에서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어머니는 혜화동 여인 사건 이후 내 주변을 감시했지만 그녀만큼은 마음에 들어 했다. 명동 메트로호텔에 묶고 있던 공미도리는 아주 곱고, 교육을 잘 받은 처녀였다. 항시 눈에 웃음이 번졌고, 말이 별로 없었다. 집안도 좋았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중의원을 지낸 부잣집 딸이었다.

 ‘현해탄의 구름다리’ 촬영이 끝난 후였던 것 같다. 어머니가 메트로호텔로 공미도리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나 모르게 양가 부모님 사이에 혼담이 오간 것이었다. 맞선인 셈이었다. 일본에서도 영향력을 막강했던 공미도리 부모는 멋쟁이였다. 나를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나온 옷차림이었다.

 일본에서도 영화배우는 인기가 치솟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한 번 공미도리 부모님과 마주했다. 그분들은 결혼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꺼냈다.

 “이곳(한국) 말고, 일본에서 생활하는 게 어떤가. 뒷바라지는 우리가 하겠네.”

 공미도리와의 혼담은 즐거운 일이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모든 여건이 좋았다. 게다가 쟁쟁한 재일동포 집안에서 사윗감으로 생각해주었으니…. 그러나 64년 당시 내 가슴에는 엄앵란이 들어와 있었다. 나와 엄앵란의 관계를 잘 모르던 극동흥업 차태진 사장은 우리 둘을 조선호텔로 불러내 이렇게 말했다.

 “앵란이는 김기덕 감독과 결혼하고, 너(신성일)는 공미도리와 결혼해라.”

 차 사장에겐 김 감독과 나, 그리고 엄앵란이 모두 중요한 존재였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보면 이런 커플을 형성하는 게 극동흥업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 엄앵란과 결혼합니다”라고 선언했다.

 공미도리는 공화당 시절 이동원 외무부 장관의 동생과 결혼했다. 엄앵란이 없었다면 공미도리와의 혼담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모를 일이다. 공미도리보다 엄앵란과의 인연이 더 강했던 것이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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