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한그릇에 1만원 시대’ 조각 수박 사먹고 편의점 커피 마시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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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부터 고(高)물가가 지속되면서 직장인도, 주부도 울상이다. 물가가 오르니 “10만원을 가져도 장을 보기 어렵다”는 주부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다. 직장인 점심값은 한 끼에 1만원을 육박한다. 소비자들도 변하고 있다. 나들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가족농장에 참석하거나, 한 푼이라도 싼 유통업체 자체브랜드(PB) 상품을 찾는 이가 크게 늘었다. 3500~6000원인 커피전문점 커피 대신 1000원대의 편의점 커피가 큰 인기다. 도시락을 싸들고 오는 직장인도 부쩍 많아졌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롯데마트 월드점 매장에서 8일 한 주부가 커팅(조각) 파인애플을 살펴보고 있다. 올 들어 롯데마트의 조각 과일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가량 늘었다(왼쪽). 8일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사은품 수 령 데스크에서 상품권 대신 그릇과 아이스박스, 가방 같은 실속형 사은품을 받기 위해 고객들이 기다리고 있다.<사진크게보기>


1 나들이 대신 주말농장

아이들 즐거워하고 신선한 채소는 덤

경기도 용인시에 사는 주부 김정현(31)씨는 요즘 현대백화점이 운영하는 주말농장에 다니는 재미에 빠져 있다. 16.5㎡(5평) 규모의 가족농장에는 토마토와 상추 등 각종 먹을거리를 심었다. 최근에는 매주 도시락을 싸서 가족들과 한나절씩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김씨는 “올해 초 네 살짜리 아들에게 자연공부나 시킬 생각으로 등록했던 것인데 나들이 비용 부담이 없는 데다 신선한 야채까지 얻을 수 있어 일석삼조”라고 말했다. 

 고물가 여파가 소비자들의 소비패턴을 바꾸고 있다. 불필요한 지출은 최소화하는 대신 저렴한 값에 비슷한 효용을 누릴 수 있는 대체 상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주말농장처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서 별도의 외식비나 관람료가 들지 않는 장소는 상한가를 치고 있다.

 강동구 상일동과 도봉구 도봉동 등 서울 외곽의 다섯 곳에 고객용 주말농장을 운영 중인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올해 고객 참석률(분양면적당 경작면적 비율)이 93%를 기록했다. 지난해 고객 참석률은 60%선에 불과했다.

 이 백화점 임은우 마케팅팀장은 “주말농장에 남는 자리가 없는지를 묻는 전화가 하루 평균 10통가량 걸려온다”며 “현재 중도 포기자가 생길 것에 대비해 접수받은 대기자가 점포별로 20~30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주부 김정현씨는 “계좌당 5만원짜리 주말농장을 신청해 놓은 덕에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될 정도”라고 말했다.

2 통과일 대신 조각 과일

수박 1통에 1만원 먹을 만큼만 사자

지난 6일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사은품 데스크에 30∼50대 주부고객들이 길게 줄을 섰다. 주부들은 이 회사 멤버십 카드고객 가운데 5만원 이상을 구매한 이들로, 백화점이 사은품으로 주는 5000원짜리 상품권이나 생필품을 받기 위해 한참을 기다렸다. 행사에서는 상품권보다 그릇·아이스박스·칼·다목적 가방·바디워시 등의 생필품을 선택한 주부들이 훨씬 많았다.

 이날 남편 셔츠를 구입하러 방문한 맞벌이 직장인 박의선(36)씨도 사은품을 골랐다. 박씨는 “7월 휴가 때 사용할 다목적 휴대가방을 구입하려 했는데 사은품으로 휴대용 가방이 나왔기에 골랐다”며 “지난해만 해도 상품권을 받아갔는데 요즘은 물가가 너무 오르다 보니 실생활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생필품을 고르게 된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이 분석한 결과 지난해 이맘때 사은품 수령률은 50∼60% 수준이었으나 올해는 사은품을 고르는 비율이 70% 선으로 뛰어올랐다. 부자동네 한복판에 있는 압구정본점의 사은품 수령률도 85%에 달한다.

 롯데마트에서는 올 들어 6월 현재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조각 과일 매출이 35%가량 늘었다. 수박 한 통 값이 1만원을 넘어서면서 비싼 과일 대신 필요한 만큼만 과일을 사는 분위기가 완연하게 자리잡은 셈이다. 자르지 않고 파는 일반 파인애플은 올 들어 매출이 7%가량 느는 데 그친 반면, 조각 파인애플은 33.7%나 늘었다. 이 회사 정진혁 과일MD(상품기획자)는 “그동안 조각 과일은 싱글족이나 맞벌이 가구처럼 많은 양이 필요 없는 고객이 사는 제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과일을 맛보기 위해 사가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업체들도 발 빠르게 이런 소비 변화를 따라잡고 있다. 롯데마트는 기존에 과일 품목별로 1~2가지 정도만 갖추고 있던 조각과일의 포장을 4~5가지로 다양화하기로 했다.

3 오리지널 대신 PB

편의점 과자·생수 1위 자리까지 넘봐 

유통업체별 자체 브랜드(PB) 상품은 최근 매출이 크게 늘어났다. 브랜드 인지도에서 기존 상품에 밀리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PB 상품은 고물가 시대를 버티려는 알뜰족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편의점 업체인 세븐일레븐은 최근 아이스크림군 제품 중 판매 1위 자리를 자체 브랜드 상품인 ‘PB와라아이스크림’이 차지했다고 8일 밝혔다. 이 제품은 지난달에만 40만2000여 개 팔리면서 2008년부터 같은 상품군 중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켜오던 빙그레 메로나(39만 개 판매)를 제쳤다. 이 제품은 개당 500원, 메로나는 개당 900원에 팔린다. 세븐일레븐 최민호 과장은 “빙그레가 지난달 1일부터 메로나의 편의점 판매가격을 개당 700원에서 900원으로 대폭 올린 반면, PB아이스크림은 기존 2종(바닐라·딸기)의 맛에 최근 초코맛까지 종류를 늘린 것이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가격 경쟁력을 갖춘 PB상품의 인기는 다른 제품군에서도 입증된다. 세븐일레븐에 따르면 생수제품 중 1위를 유지하고 있는 농심 삼다수(500mL·750원)는 지난달 78만7000개가 팔렸다.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이 회사의 500원짜리 PB생수는 73만2000개가 팔렸다.

 500원짜리 PB과자류도 농심 새우깡, 오징어칩 등에 이어 4위(판매수량 기준)에 올랐다. 이들 PB제품의 약진은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서민 주택가나 각급 학교 주변 편의점에서 더 뚜렷하다. 세븐일레븐 측은 “편의점이라고 해서 무조건 비싸게 받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며 “제품력과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다양한 상품들로 대형마트와도 경쟁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4 전문점 대신 편의점 커피 

커피 줄일 순 없고 1000~2000원대로

고물가에도 커피 소비는 꾸준한 편이다. 스타벅스와 엔제리너스 같은 커피 전문점들의 매출도 꾸준히 늘고 있다. 하지만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의점 판매 커피나 햄버거 전문점 판매 커피의 매출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편의점 커피는 일반적으로 잔당 1000~1500원 선, 햄버거 전문점 커피는 잔당 1500~2000원 선이다.

 편의점 업체 훼미리마트의 아이스커피는 지난 한 해 동안 2500만 잔이 팔리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지난 4월 한 달 동안 전년 같은 기간보다 515%나 매출이 늘었다. 5월 매출신장률도 252%에 달한다. 훼미리마트 측은 “고물가가 이어지면서 식사 한 끼 값에 버금가는 전문점 커피를 찾던 고객들이 맛과 품질의 차이가 크지 않은 편의점으로 대거 발걸음을 돌린 것 같다”며 “성수기인 여름이 되면 판매량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햄버거 전문점인 롯데리아는 지난달 아메리카노 커피(잔당 2000원) 매출이 2010년 5월보다 46%가량 늘었다. 식사 후 입가심을 할 수 있는 500원짜리 아이스크림도 34%가량 매출이 뛰었다. 롯데리아 측은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 커피제품군의 구색을 더 다양화할 계획이다. 한국맥도날드 측 관계자는 “아이스크림과 커피 같은 실속형 제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매출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밝혔다. 

이수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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