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으래서 심었더니 헐값... 관료는 현장 모르고 농민만 골병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21호 04면

3일 전남 해남군 산이면 배추밭에서 수확 작업을 마친 농부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최근 배추 가격이 폭락하자 농부들이 밭을 갈아엎거나 좋은 포기만 수확해 절반 가까운 배추가 버려지고 있다. 해남=조용철 기자

#1. 3일 오전 9시 전남 해남군 배추밭
해남군 땅끝 마을에서 10여㎞ 떨어진 산이면 예정리 마을엔 아직 아침 안개가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 5940㎡(1800평) 넓이의 밭에는 30㎝ 크기의 배추 1만여 포기가 고랑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해남은 대표적인 배추 산지 가운데 하나다. 수확 작업에 안성맞춤인 날씨였지만 인부들은 보이지 않고 트랙터만 한 대 덜렁 서 있었다.
“시작합시다.”

[농정실패 현장 르포] 석 달 전 1만원 하던 배추밭 갈아엎는 해남

산이농협의 오광준 과장이 신호를 보내자 트랙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 끌고 가는 칼날이 돌아갈 때마다 배추가 뽑혀 나와 쓰러졌다. 밭 주인은 애써 키운 배추를 갈아엎는 모습이 보기 싫은지 곧 모습을 감췄다. 이곳은 산이농협이 올 3월 10a(300평)당 최저 62만4000원을 보장해 준다는 계약 아래 배추를 심은 밭들 가운데 일부다. 최근 배추값이 폭락하자 수확을 포기한 것이다. 오 과장은 “그나마 농협과 계약재배한 농가는 농협에서 손실을 떠안은 덕에 큰 손해를 보지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농협 계약재배 비중은 낮다. 해남군의 경우 전체의 20% 수준이다. 전국적으로 농협의 계약재배 물량은 9%대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농민이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지난달 말 정부는 배추값 안정을 위해 1만t을 자율 감축하는 대책을 내놨다. 오 과장은 “공급을 줄여 가격 하락을 막겠다는 고육지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계약재배하지 않은 농가는 45만원밖에 받지 못하는데도 신청이 밀려 비닐하우스 위주로 선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돈은 농축산물가격안정기금(농안기금)에서 지원한다. 농협이 집계한 신청 물량은 44만t을 넘어섰다. 오 과장은 “5t트럭 한 대 분량(2000포기)의 배추를 수확해 포장하는데 인건비 35만원과 운반비 45만원이 든다”며 “팔아봐야 원가에도 못 미치니 그냥 폐기하고 일부 비용이라도 건지려는 농민들이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석 달 동안 공들여 키운 배추를 모두 갈아엎기까지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고 뜨거운 햇살이 비치자 대부분의 배추가 누렇게 변했다. 그는 “배추는 수분이 80%가 넘어 밭에 그냥 둔다고 밑거름이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병충해의 원인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2. 같은 날 오후 1시 해남의 다른 배추밭
차로 15분 정도 이동하자 수확이 한창인 배추밭이 나타났다. 5t 트럭 다섯 대가 연달아 배추를 실어 날랐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사람들의 손길이 지나간 곳에도 절반 정도의 배추가 남아 있었다.“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수확하지 않아요.”

15년째 배추를 취급한다는 산지수집상 박진기(56) 사장이 말했다. 버려진 배추를 살펴봤다. 박 사장이 다가와 식칼로 절반을 쪼개 준다. 연노란색의 배추 속은 싱싱한 물기를 머금어 달콤했다.

박 사장은 “지난해 ㎏당 700원 할 때는 이보다 못한 배추도 모두 거둬갔지만 지금은 100원도 안 해 좋은 것만 골라 수확한다”고 말했다. 그는 “두 달 전만 해도 서울 대형마트에서 포기당 1만원씩 팔리던 배추가 이젠 처치 곤란한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박 사장은 전국 각지의 농민과 계약한 배추밭 20만 평을 돌며 배추를 수확해 김치공장에 납품한다. 이른바 ‘큰손’이다. 봄에서 여름 사이에는 해남 외에도 충남 해미, 경북 문경에서 월동 배추와 봄 배추를 수확한 뒤 찬바람이 불면 김장 배추를 수확하러 강원도 태백으로 이동한다. 그는 “농산물값 파동 못지않게 현장을 모르는 관료들이 뒷북을 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 호통을 치면 농식품부에서 농협중앙회를 닦달하고, 그러고 나서야 유통공사 등이 현장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올 초까지 배추값이 내리지 않자 농협이 뒤늦게 물량 확보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급해서 그랬는지 지역농협에 물량 확보를 맡긴 게 아니라 중앙회가 직접 나섰지요. 매일 서류만 보던 사람들이 현장을 아나요. 농민들과 연결이 안 되니 중간상인에게 주문했지요. 그래서 t당 150만원 정도이던 시세가 170만원으로 올랐습니다. 가뜩이나 높은 가격을 더 높여놓은 셈이지요. 그거 아마 냉동창고에 남아 있을걸요. 재작년에도 김장 물량을 확보한다고 5t 트럭으로 500대 분의 고랭지 배추를 냉동창고에 쟁여 뒀다가 가격이 생각 외로 일찍 안정되자 그냥 폐기한 적도 있어요.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 팔아야 할 타이밍을 제대로 잡을 수 있겠어요?”

그는 중간 유통상인을 가격파동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이 못내 억울하다고 했다. 농민과의 계약재배를 통해 수급을 조절하는 순기능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농협 계약재배 물량이 늘고 시세가 안정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중간상인에게도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폭등과 폭락이 되풀이되면 웬만한 자금력으로는 한 방에 무너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배추값의 고공행진이 이어질 줄 알고 최근까지 물량을 쥐고 있던 일부 상인은 수십억원의 손해를 보았다는 얘기도 귀띔해줬다.

“농협에서 농민과 도시 소비자들이 직거래할 수 있는 유통 채널을 많이 만들어야 해요. 계약재배도 늘려야 값이 안정될 텐데 잘 안 움직입니다. 어차피 월급받고 일하는 직원들로선 돌아오는 게 없는데 자기 일처럼 뛰어다닐 이유가 있나요. 윗사람과 공무원 눈치나 볼 뿐이죠.”

굼뜬 관료조직이 문제 키워
배추는 한국 농정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바로미터다. 배추는 너무 추우면 재배가 안 되지만 기온이 너무 높아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8월에 강원도 고랭지에 심어 11월까지 출하하는 김장 배추, 9월에 심어 이듬해 2월 중순까지 수확하는 월동 배추, 3월에 심어 6월 중순까지 거두는 봄 배추로 나눈다. 김장 배추는 태백·영월 등이 주산지고, 월동 배추와 봄 배추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충남 서산·해미, 전남 해남·보성 등에서 재배한다. 전국에서 연중 재배되는 채소라 제대로 수급관리를 하지 못하면 파동이 오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잦은 비로 김장 배추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자 소매 가격이 포기당 1만5000원까지 뛰었다. 월동 배추 역시 강추위로 수확이 시원치 않아 올 3월까지 배추값이 1만원 이상을 유지했다. 정부는 배추 수입을 늘리는 한편 봄 배추 재배를 장려했다. 농협중앙회에서는 전국에 300만 주 분량의 배추 씨를 무료로 보급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노지 봄 배추 재배면적은 7308㏊로 지난해보다 20% 증가했다. 비닐하우스에서도 수박·참외 대신 배추를 심는 곳이 늘었다. 하지만 봄 배추 수확이 본격화하면서 가격은 폭락했다. 2006년과 2009년에 이어 최근 5년 새 세 번째로 일어난 배추 파동이다. 값이 오르면 공급을 늘리고, 결과적으로 6개월 뒤에는 갈아엎는 일이 1~2년에 한 번꼴로 되풀이된다.

이에 대해 농식품부 채소특작과 김도범 계장은 “배추는 자라는 데 오래 걸리지 않고, 저장이 어려운 특성 때문에 가격 변동이 심한 편”이라며 “올 초에 배추값이 너무 높은 상태가 이어지면 물가 문제 등이 생기니 봄 배추를 좀 더 재배하라고 홍보했는데 경기 침체로 식당 김치 소비 등이 줄어드는 바람에 공급량이 너무 많이 넘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배추값 문제는 김치가 완충작용을 해줘야 한다”며 “김치업체들이 저온저장 창고를 늘리도록 일부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한편 배추 수출도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농정 관계자들은 냉탕·온탕을 오가는 관료 조직의 근시안을 지적했다.

▶최경식 농협대학 교수=마치 ‘바보들의 샤워법’을 보는 듯하다. 샤워 물이 차가우면 뜨거운 쪽으로 돌려놓고 조금 기다려야 하는데 레버만 마구 돌리며 ‘앗 차거, 앗 뜨거’를 되풀이한다. 배추뿐만 아니라 식량 확보를 비롯한 농업정책 전반적인 문제다. 농업은 스포츠로 보면 장거리 종목이다. 조급증에 빠져 가시적인 효과에만 집착하지 말고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밀고 나가야 한다.

▶김병수 산이농협 상무=배추값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1000원이다. 정부와 언론은 인건비·자재비 오른 건 전혀 감안하지 않고 농산물 값이 오른다고 아우성을 친다. 비료 값만 해도 2~3년 전에 포대당 1만원 하던 게 1만8000원으로 올랐다. 인건비도 하루 6만3000~6만5000원은 줘야 한다. 자동차 값, 자장면 값도 오르는데 배추 한 포기가 3000원이 된다고 큰일 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정환 GS&J인스티튜트 원장(전 농촌경제연구원장)=배추값 파동은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명확지 않아 생기는 문제다. 공급 부족으로 값이 올랐는데 범정부 차원에서 대처한다고 나설 필요가 없었다. 농업을 자꾸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보는데 이는 땅값 비싸고 인건비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농정의 장기 비전이 없으니 쌀 관세화도 못하고, 돼지고기 수출에 얽매이다 구제역 문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