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23) 외환위기와 하나은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9면

정부는 금융산업 구조 개편을 위해 1997년 1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금융개혁위원회를 발족했다. 97년 2월 11일 박성용 위원장(왼쪽에서 둘째)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금개위 현판식을 열고 있다. 금개위는 그해 6월 금융감독기관을 통합하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했다.


위기는 늘 갑자기 닥치곤 한다. 돌아보면 미리 신호가 깜빡였지만 당시엔 이를 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많다. 삼미·한보·진로·기아 등 중견그룹이 줄줄이 부도를 내던 1997년 국내 금융 상황이 바로 그랬다.

 하나은행장의 두 번째 임기를 불과 한 달 여 앞두고 있던 97년 1월 7일. 김영삼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민간인으로 구성된 금융개혁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가장 큰 화두는 경제 체질 개선이었다. ‘고비용 저효율’은 우리 경제의 급소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었다. 원화가치가 올라가면서 수출이 급감하고 외채는 급증했다. 금융사고가 빈발하고 금융회사의 재무구조도 나빠졌다.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금융시장을 개방하라는 요구는 커져 갔다.

 금융개혁위원회는 이러한 금융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소하자는 취지에서 발족됐다. 금융제도·관행·의식을 바꾸는 방안을 1년 동안 연구하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외환위기’라는 단어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97년 1월 22일 마침내 금융개혁위원회가 발족했다. 기업인과 학계, 금융계 전문가 31명으로 구성됐다. 금호그룹 명예회장이었던 고 박성용 전경련 부회장이 위원장을, 김병주 서강대 교수가 부위원장을 맡았다. 나도 위원으로 참여했다.

 “경쟁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금융시장과 제도를 만드는 개혁을 하자.” 금개위의 목표는 뚜렷했다. 그때 활동이 돋보였던 위원 중 한 사람이 한국조세연구원 고문으로 있던 이헌재씨였다. 다른 위원들이 일반론을 얘기할 때 이헌재씨는 법전을 가져와서 해당 법규정이 뭔지, 법을 바꾸면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법규정에 따라 생길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적절하게 지적해줬다. 금융인이나 교수들이 할 수 없는 부분을 그가 메워줬다.

 금개위는 97년 3월에 1차, 6월에 2차 보고서를 만들었다. 2차 보고서엔 은행·보험·증권감독원을 통합하고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한국은행 총재가 맡고 은행 소유지분 한도를 10%로 높이는 내용이 담겼다.

 당장 금융계가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났다. 한국은행과 재정경제원은 서로 자기 영역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가까스로 8월에 7개 법률 제·개정안이 국회로 올라갔지만 이번엔 정치권까지 딴죽을 걸고 나섰다.

 시장 상황은 한가로울 수 없었다. 97년 7월 태국 바트화가 폭락하면서 외환시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금개위는 태국 사태를 보자 조급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법안을 처리해야 외국인 투자자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 아니냐.”

 정부와 국회에도 처리를 서둘러 달라는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해집단들에 가로막혀 도통 진척이 없었다. 그때 만약 금융개혁법이 국회에서 빨리 통과됐더라면 외환이 바닥나 국가 부도 위기로까지 몰리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금융개혁법은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을 결정한 뒤인 그해 12월 29일에야 통과됐다. 우리 손으로 할 수 있었던 개혁을 결국 남에게 떠밀려 처리한 셈이었다. 다들 자기 앉은 자리만 생각하다 일을 크게 그르치고 말았다. 정말 아쉬운 일이다.

 물론 이후 DJ정부 들어 이헌재 장관이 금융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 금개위 보고서도 얼마간 도움이 됐으리라고 본다.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이전 은행들의 기업 대출에서 잇따라 부실이 터져 나왔다. 97년 10월 22일 기아자동차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하나은행이 7000억원가량을 대출해준 회사였다. 하나은행의 덩치에 비해 적지 않은 대출금이었다.

 그럼에도 하나은행은 손실을 보지 않고 넘어갔다. 은행 직원들이 부실을 피하기 위해 미리 방법을 찾은 덕분이다. 대출금 7000억원을 기아차 고객들이 내는 자동차 할부금과 맞바꿔 놓았다. 돈을 좀 더 빌려주는 대신 자동차 할부금을 받는 걸로 협상에 성공했다. 기아차가 부도 나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다.

 자동차 할부금과 대출금을 맞바꾼 협상은 당시 회장으로 있던 나나 김승유 행장이 지시한 게 아니었다.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소신껏 일한 결과였다. 물론 그때 일로 김 행장은 상당히 고초를 겪기도 했다. ‘대출은 같이 하고서 어려울 땐 혼자 빠져나가냐’며 다른 은행으로부터 욕도 먹었다. 하지만 덕분에 하나은행은 외환위기의 혹독한 폭풍우 속에서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살아남은 금융회사가 될 수 있었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