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지 않은 이야기를 흥겹게...인간의 허영자만을 꼬집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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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호 05면

하버드대학 출신이 안무를 한다고? 1990년대 말 국제 무대에서 급부상한 이스라엘 안무가 버락 마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첫 느낌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유명 원로 무용수이자 가수였던 마거릿 오베드의 아들이다. 대학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전공할 때까지만 해도 예술 경력이 없었던 그가 나이 들어 엄마처럼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니,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미국에서 성장해 이스라엘로 넘어간 이후 발표한 초기작에 대한 반응도 사실 신기함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이스라엘 현대무용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었던 오하드 나하린의 아류 정도로 저평가했다.

버락 마셜의 현대무용 ‘루스터’, 25일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하지만 국제현대무용제(MODAFE) 초청으로 지난 25일 서울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른 ‘루스터’(Rooster)는 이런 선입견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제목 ‘루스터’는 ‘수탉’이라는 뜻이지만 ‘수탉처럼 머리를 곧추세우고 잘난 체하는 사람’도 의미한다. 인간의 시기와 질투, 그 속의 허영과 자만을 꼬집겠다는 의도가 담긴 제목이다. 이 작품은 유대계 폴란드 작가 IL 페레츠의 풍자적 단편 ‘말없는 본체(Bontsche the Silent)’의 내용을 소재로 했다.

마셜은 지나치게 설명하거나 교훈적인 의미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적절하게 주제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커다란 보라색 깃털을 소품으로 12명의 무용수들이 닭이 되어 서로를 헐뜯고 쪼아대는 장면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이었지만, 진부함 속에서 신선함이 느껴졌다. 무용수들의 살아있는 연기와 과감한 몸동작이 그 비결이었다.

마셜의 극은 한마디로 잡동사니를 연상하게 한다. 소재도 한 가지가 아닌 베케트와 페레츠의 소설, 성경 등에 나오는 제목과 관련한 이야기를 뭉뚱그렸다. 음악도 집시음악, 미국 유대민요, 중동, 발칸반도 지역 음악이 마구 뒤섞여 있다. 오페라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하기도 한다. 한 남자의 꿈속에서 펼쳐지는, 사랑을 갈구하고 결국 타인에 의해 희생되는 비극은 복잡하기만 하다. 다의적이어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구성 면에서 무질서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다.

하지만 관객의 시선을 시종일관 붙잡는 힘은 분명하게 있다. 잡동사니 속에서 피어나는 순박함, 흥분 속에 살아있는 열정! 결코 즐겁지 않은 이야기를 그는 흥겹게 풀어낸다. 그는 관객과 소통하는 방법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전 세계 유명 극장에서 이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다.

명문대 출신이라는 잘난 체도, 지적이고자 하는 강박관념도 없는 마셜의 언어엔 땀냄새 나는 인간미가 철철 넘칠 뿐이다. 신나는 왈츠에 맞춘 군무가 그렇고, 오색등과 폭죽 속에 진행되는 익살스러운 결혼식 장면이 그렇다. 알 낳은 닭을 묘사한 장면은 기발하다.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버버리 코트 속에서 피어나는 연기로 묘사한 아이디어 또한 재미있다. 넘치는 듯한 과격한 동작 속에 드러나는 절제미는 덤이다. 후반부로 가면서 짧게 끊어지는 장면들의 나열이 긴장감을 흐트려 놓긴 했으나 전체적인 흐름에 크게 방해가 되진 않았다. 검은 눈, 붉은 입술로 과장된 분장을 한 무용수들이 코믹하게 서로를 견제하고, 그러면서 하나의 동족임을 묘사하는 결말은 풍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활동 초기에 각광받던 많은 안무가들이 쉽게 매너리즘에 빠지고 ‘기발함이란 이런 거야’라는 자기의 꾀에 자기가 속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 기발함은커녕 자기복제를 하고 있다는 비판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던가.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과거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창작이라는 전제하에 행해지는 예술작품의 가치는 얼마나 독창적인가에 의해 판단된다. 그 독창성은 남의 것은 물론 자기 것과도 비교한 결과이어야 한다. 마셜의 예술세계에 새롭게 빠져들면서 한편으로 그에게 이러한 바람을 가져봤다. 신선함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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