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김정일 중국 방문과 남북 물밑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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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 중이다. 1983년 6월 후계자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이후 여덟 번째이고, 지난해 5월 이후 벌써 세 번째다. 예측을 깬 이례적인 방문인 만큼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우선 김정은 후계체제를 정비했고 김 위원장이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상태에서 후계자에게 안정적인 외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친선 방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경우 김 위원장의 방문은 앞으로 수시로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김 위원장이 건강을 회복하면서 조기 레임덕을 방지하고 김정은 후계체제에 대한 속도 조절에 나섰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김정은의 단독 방중은 김 위원장 방중 결과 ‘손에 잡히는 결실’을 거둘 수 있을 때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북·미 관계와 북·중 관계, 남북 관계 현실은 김 위원장 스스로 나서 가닥을 잡아 줘야 하는 국면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김 위원장의 방중에는 북·중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합치했다. 중국은 동북아에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는 한편 미국의 견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북한 카드의 유용성을 다시 주목했다. 2009년 7월 말 북·중 관계가 재정상화된 이후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에 대해 중국이 정치적 침묵을 유지한 것이나 최근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이 낸 연례보고서에 대한 거부권 행사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북한도 한국과 미국을 우회해 국제사회로 나갈 수 없다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중국에 대한 접근을 강화했다. 특히 2012년 ‘강성대국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을 묶어 두고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를 적극적으로 풀어야 했다.

 실제로 북한은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 왔다. 김 위원장이 방북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매개로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이나 그동안 북·미 대화의 의제로 간주한 한반도 평화 문제와 핵 문제를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수용한 것도 변화의 일단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방중도 창춘~지린~투먼강 유역 개발협력과 나진~선봉의 물자수송로 확보 등 단순한 경협을 넘어 남북 관계 개선 및 비핵화회담과 관련해 새로운 합의를 통해 6자회담 모멘텀을 살리고자 한 의도가 있다.

 현재 한반도 상황은 한·미 공조체제가 이 국면을 주도하기도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 로버트 킹 국무부 북한 인권특사를 단장으로 하는 미국 식량조사단의 방북 이후 북·미 관계에 변화의 징후가 있고, 특히 미국이 원포인트 사찰과 6자회담 연계를 마냥 거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일관성 있는 대북 정책의 결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대북한 지렛대를 가지게 됐다는 자평(自評)과는 달리 이것이 지속 가능한 대북 정책이 되기 어렵고 주변국의 전략적 인내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내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에 김 위원장을 초청했다. 북한 조평통의 날 선 비난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으로 나왔다고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북한도 급속한 북·중 관계의 그림자를 내심 우려해 왔다. 북한이 새롭게 남북 관계를 주목한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남북 대화의 진전을 위해서는 ‘남북 대화와 6자회담’ 그리고 ‘천안함과 비핵화’에 대한 복잡한 전제가 낀 복합방정식을 한꺼번에 풀어야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피해 갈 수는 없다. 김 위원장 방중을 계기로 남북한 물밑대화도 시도할 필요가 있고 한·중 전략대화도 좀 더 내실 있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시간도 반드시 우리 편이 아니다. 이 기회를 잃게 되면 한국은 북한에 대한 지렛대를 상실해 수용적 행위자로 전략할 가능성이 크고 현상 타파적 위기도 고스란히 짊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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