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텐안먼 사태는 바꿔놓았다 중국인의 삶도, 사랑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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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골드 보이, 에메랄드 걸
이윤 리 지음, 송경아 옮김
학고재, 368쪽
1만5000원

소설가 김훈씨가 “이상한 사랑이 자연스러워 이 소설은 비상하다”고 토를 달만하다. 중국과 중국인 얘기를 이렇게도 할 수 있다니. 미지근한 목욕물 속으로 몸을 담그는 듯싶던 첫 소설 ‘여름의 마지막 장미’는 한 장을 넘기자 나지막한 작가의 목소리가 읽는 이 정수리에 찬물을 쏟는다. “나처럼 무심한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의 삶에 도사린 삭막함을 들여다보는 건 끔찍한 일이다.”(10쪽) 어휘란 저절로 흘러나오는 법이 없다. 중국계 미국 작가 이윤 리(39·李翊雲·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는 1989년 ‘텐안먼(天安門) 세대’로서 발언한다. 왜냐하면 “9·11 테러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에 관련한 이야기를 갖게 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베이징 대학시절 분신처럼 보이는 주인공 모얀은 죽어서야 끝나게 될 인간의 상처 입음을 ‘친절(이 소설의 원제는 ‘Kindness’)’이 치유하리라고 속삭인다. 군더더기를 걷어낸 그녀의 면도날 같은 묘사는 소설이야말로 현실 속으로 곤두박질하는 일이며 현실 체제에 충격을 주는 일임을 모질게 다루고 있다. 무대는 중국과 미국이지만 한국이라 해도 무리 없는 초월의 시공(時空)이 9편 중·단편을 엮는다.

 분자생물학 박사 과정을 밟으러 미국 유학에 올랐다가 영어로 글 쓰는 작가가 된 이윤 리는 “사람의 운명은 자기가 가진 것이 아니라 갖지 못한 것으로 결정돼”(109쪽)는 이상하고도 슬픈 삶을 아프게 벼려낸다. 오늘의 중국을 “오랜 만에 만난 친척 아이가 훌쩍 자라 있는 어색한 모습”이라 비유한 심정 탓일까. 중국 출판사의 출간 제의를 거절한 그는 한국어판이 너무 소중하다며 “이로써 나의 책이 고향에 가장 가까이 갔기 때문”이라는 소회를 털어놨다. 함께 나온 작가의 첫 단편집 『천년의 기도』 개정판에서 만나는 ‘독재자를 닮은 아이’는 방황하는 중국의 초상이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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