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이념 뒤에 숨은 광신 메커니즘, 근대 정치는 종교사의 한 장일 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추악한 동맹
존 그레이 지음
추선영 옮김
이후, 332쪽
1만8000원

이 책은 단 한 줄의 강력한 선언으로 독자의 지성을 유혹한다. “근대 정치는 종교사의 한 장일 뿐이다.”

 무슨 소리인가? 근대 정치는 종교와 결별함으로써 태어난 게 아닌가. 저자는 “근대 혁명운동은 방식만 달리할 뿐, 종교의 계보를 잇는다”고 단언한다. 여기서 ‘종교’란 기독교다. 초기 기독교에 내재된 ‘종말 신학’, 중세와 종교 개혁기에 횡행했던 ‘천년왕국 운동’…. 그 극단적 소수의 패배한 운동 말이다.

 저자는 프리메이슨 류의 비밀 종교결사가 어둠의 장막 뒤에서 역사를 조종해 왔다는 식의 해괴한 주장을 늘어놓는 저술가가 아니다. 존 그레이(John Gray)는 영국 런던정경대(LSE) 유럽사상사 교수(2008년 퇴임)를 지냈다. 서구 정치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근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저지른 학살극의 ‘신화적 본질’을 파헤친다.

 예컨대 조지 부시(George W Bush) 전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2002년 ‘악의 축(Axis of Evil)’을 지목했다. 중세 종교전쟁에나 어울릴 법한 용어가 21세기 외교정책을 규정한 것이다. 문제는 ‘악의 존재’가 아니라 ‘악이 파괴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저자가 보기에 1980년대 태동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는 그들이 적대했던 공산주의 체제를 낳은 레닌과 다를 바 없는 급진적 혁명가다.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의 전세계적 확산이란 신보수주의자들의 신념은 공산주의가 인류 진보의 ‘마지막 단계’라고 확신했던 좌파 혁명가들의 의식 세계와 일치한다. 무엇보다 “폭력을 통해 인류를 개조할 수 있다”는 자코뱅당의 신념을 공유한다. 그렇게 역사 속에서 구원을 찾는 행위는 예수의 재림을 통해 세상이 정화되리라고 믿었던 천년왕국 신화의 세속적 재연이다.

 극단적 이념이 저지른 폭력 말고도, 모든 정치 운동 속엔 적대자의 배척내지 개종을 강요하는 정신적 폭력이 잠재한다. 더구나 자신만이 옳다고 믿는 좌와 우의 이상주의자, 한 때는 ‘순교자’였겠지만 언젠가는 ‘독재자’로 부활할 광신적 예언자가 있다.

배노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