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무거운 짐’ 유로화 내려놓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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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그리스의 신 아틀라스가 경제력에 비춰 고평가된 유로화를 짊어지고 힘겨워하고 있다. 유로화 고평가는 그리스의 수출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유럽 구제금융의 사령관인 앙겔라 메르켈(57) 독일 총리는 지난해 4월 “그리스가 철저하게 구조 개혁으로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면 시장의 신뢰를 얻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조정 요구가 너무 가혹하다는 지적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리스가 구제금융 1460억 달러(약 159조1400억원)를 받은 지 1년이 됐다. 여전히 그리스는 시장에서 한 푼도 꾸지 못하고 있다. 9일(현지시간)엔 미국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BB-에서 B로 낮췄다. 무디스와 피치도 조만간 강등에 나설 듯하다. 그리스가 스스로 자금 조달을 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 단계에 진입했다. 메르켈의 구조 개혁 요구가 그리스의 실물경제를 더 어렵게 했다는 평이 우세하다. 실제 그리스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6%대다. 실업률은 14% 수준이다. 국내총생산(GDP)과 견준 재정적자는 10% 정도다.

 글로벌 시장에선 온갖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다. 채무 구조조정(워크아웃)과 구제금융 추가 지원, 구제금융 조건 완화, 그리스의 유로(euro)화 포기 등이다. 10일 현재 워크아웃 논의는 일단 정지된 상태다. 유럽 채권은행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유럽중앙은행(ECB)이 강하게 반대해서다.

 대안으로 구제금융 추가 지원이 먼저 고려되고 있다. 그리스에 좀 큰 용량의 산소호흡기를 물려 유럽연합(EU) 금융안정펀드가 상설화되는 2013년까지 수명을 연장하려는 의도다. 메르켈은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추가로 받으려면 좀 더 철저하게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벨기에 루뱅대 폴 드 그루베(경제학) 교수는 이날 블로그 칼럼에서 “메르켈이 추가 지원에 반대하는 독일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더 철저한 구조조정’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메르켈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얘기다.

 그리스도 한계상황이긴 마찬가지다. 구제금융의 굴레를 벗을 날이 아득한데 긴축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그리스인들 사이에선 독일·프랑스 등의 구제금융이 자국 채권 금융회사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독일의 올 2월 무역흑자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라는 소식이 전해진 뒤엔 유로화에 대한 불만도 커지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경제체력보다 고평가된 유로화 때문에 침체가 더 심해지고 있는 반면, 독일은 경제력보다 저평가된 유로화 덕분에 무역흑자를 누리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불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추가 긴축은 그리스인들의 극단적인 선택을 부를 수 있다.

 조짐은 이미 나타났다. 지난주 말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그리스가 유로화 포기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스의 유력 경제지인 카티메리니는 자국 경제관료들의 말을 빌려 “유로화 포기는 터무니없는 가설”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리스 국민은 경제상황이 더 나빠지면 긴축의 고통과 유로화의 효용을 다시 따져볼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스가 유로화를 포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유로존을 탈퇴하고 옛 통화인 드라크마를 부활시킬 수 있다. 아니면 유로존에 남아 있되 국내용 통화를 발행하는 길이다. 어느 쪽이든 그리스의 부채 4500억 달러를 제때 상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유로화는 신뢰성 위기를 맞는다. 국채 선물·옵션과 신용파생상품 시장 등도 혼란을 피할 수 없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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