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⑫ 적(赤)과 흑(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신성일의 데뷔작 ‘로맨스 빠빠’(1960). 김승호(왼쪽)의 아들로 출연했다. 신성일은 신상옥 감독의 지시로 ‘로맨스 빠빠’ 대본을 김희창 작가에게 받아왔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고백한다. 나의 야망은 또래 젊은이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1959년 8월, 508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신필름 전속 신인배우로 선발된 다음 날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매달 월급 5만환을 받았다. 화폐개혁(1962년 6월 10일) 전인 1959년, 5만환은 엄청난 돈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한 기업인 유한양행의 과장급 월급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방황하던 젊은이였던 내게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

 당장 최고 부자 동네인 가회동에 하숙집을 잡았다. 깨끗한 한옥에서 2만 5000환을 내고 독방 하숙을 시작했다. 월급의 반이나 들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다른 젊은이라면 월급을 알뜰살뜰 모아 훗날을 도모하고자 했겠지만 난 달랐다. 스스로를 최고로 대접해야 진짜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싼 방값은 자존심에 대한 투자였다.

 가회동은 전통적으로 양반·나인·상궁 등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집안이 망하기 전까지 나 역시 대구 한옥에서 자랐기 때문에 부촌과 한옥의 분위기를 알았다. 가회동엔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 육영수 여사의 오빠 육지수 박사, 대한양회 이정림 회장, 김활란 박사 등이 살았다.

 아마 나는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앵처럼 야심 찬 인물이었던 것 같다. 소설에서 적(赤)은 군인을, 흑(黑)은 성직자를 상징한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배경이 없는 사람이 출세하는 길은 적, 또는 흑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야심만만한 청년 쥘리앵은 출세를 위해 적의 길을 선택한다. 난 이빨 물고 가회동 생활을 꾸려갔다.

한운사 작가(左), 김희창 작가(右)

 우선 인맥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 중심은 신필름이었다. ‘춘희’ ‘이 생명 다하도록’ 등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흥행 가도를 달리던 신 감독이 1960년 첫 작품으로 준비하던 영화가 ‘로맨스 빠빠’였다. 신필름 입사 후 얼마 안됐을 무렵, 신 감독은 김희창 작가에게서 ‘로맨스 빠빠’ 대본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신 감독은 나를 ‘로맨스 빠빠’의 막내 아들로 출연시킬 심산이었던 것 같다.

 김희창 작가가 누구인가. 당시에는 라디오 드라마가 최고 인기였다. 일본 VOA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한 그는 라디오 드라마 ‘로맨스 빠빠’ 등을 히트시킨 인기 작가로, 신필름의 각색 작가로도 활동했다. 김 작가 집은 세검정에 있었다. 김 작가 부인이 차 대접을 하는 게 그렇게 정갈할 수 없었다. 인정이 그리웠기에 그 집에서 차 한 잔 대접받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또 심부름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 식으로 당대 최고 라디오 드라마 작가 한운사도 만날 수 있었다. 김 작가와 한 동네에 살고 있던 한운사는 ‘빨간 마후라’ ‘남과북’ ‘현해탄은 말 없다’ 등으로 인기 절정이었다. 잦은 심부름을 통해 그와도 인연을 맺었다. 최고 작가들에게 존재를 알리는 것보다 더한 지름길이 어디 있는가.

 신필름 사무실에는 6대 신문사 영화 담당기자들이 출입했다. 회사로 걸려오는 전화를 마땅히 받을 사람도 없었고, 있더라도 귀찮아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전화를 독점하다시피 하며 기자들의 목소리를 익혔다. 영화에 대한 식견과 정보력을 갖춘 그들이었다. 『적과 흑』의 주인공처럼 야심만만했던 난 초년 시절부터 곁에 든든한 우군을 둔 셈이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