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릿 통장’ … 스위스 비밀계좌는 아니지만 아내 모르게는 할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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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에서 일하는 송모(42) 부장은 A은행을 이용하지만 아내가 모르는 ‘비자금’ 통장은 B은행에 개설해 뒀다. 하지만 A은행과 B은행이 합병을 하면서 들킬 위기에 처했다. 송 부장은 “인터넷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보안계좌’를 이용해 아내의 감시를 피하고 있다”며 “인터넷상에 보이는 총예금 잔액에도 보안계좌의 잔액은 차감돼 표시되기 때문에 당당하게 아내 앞에서 인터넷뱅킹을 한다”고 말했다.

 은행 지점에는 등록돼 있지만 전자금융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투명 계좌’가 최근 소리 없이 인기다. 공식 명칭은 ‘보안계좌’. 가장 큰 특징은 인터넷·모바일뱅킹 등으로는 입출금은 물론 거래내역 조회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직접 은행으로 가거나 자동화기기(ATM)를 통해서만 조회나 거래를 할 수 있다. 국민·우리·신한·하나·기업은행 등 시중은행이 이 서비스를 운용하면서 이용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보안계좌는 말 그대로 ‘보안’이 생명인 만큼 해당 은행은 전체 계좌 수나 예치 금액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은행업계 전체로는 전체 이용자의 0.2~0.3% 정도가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며 “최근 2~3년 새 이용 고객이 해마다 50% 이상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보안계좌는 인터넷 뱅킹에 따른 해킹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만든 서비스다. 금융 정보 유출로 돈이 몰래 빠져나가는 것을 우려하는 고액 고객의 요구가 늘면서 나왔다. 하지만 당초 의도와 달리 일반인이 주로 사용한다. 아내 몰래 비자금을 만들어놓은 남편, 남편 몰래 여윳돈을 굴리는 맞벌이 아내, 자식에게도 돈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은 60~70대 노년층 등이다.

 서울여대 한동철 경영학과 교수(부자학연구학회 회장)는 “사생활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현상이 심화하면서 가족에게도 자신의 돈 씀씀이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 현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우리 사회가 더 잘살수록 이런 현상은 두드러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가끔은 고객이 진짜 비자금을 보안계좌에 맡기려는 황당 사례도 나온다. 한 은행 관계자는 “ ‘검은돈’으로 의심되는 거액을 맡기려는 경우도 있었다”며 “보안계좌를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 정도로 착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과세를 위해 해당 계좌가 금융당국에 보고되기 때문에 탈세나 돈세탁을 위한 불법 계좌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보안계좌보다 더 강력한 기능을 갖춘 서비스도 있다. 우리은행의 ‘시크릿 뱅킹’ 서비스는 인터넷·폰뱅킹은 물론 ATM 이용까지 제한된다. 해당 계좌는 서비스를 신청한 해당 영업점 창구에서 해당 영업점장이 허락해야 돈을 인출할 수 있다. 우리은행 다른 영업점에서조차 거래가 안 된다.

보안계좌와 기능이 비슷하지만 인터넷뱅킹 거래가 가능한 ‘숨김계좌 서비스’도 있다. 인터넷을 통해 계좌를 숨기면 해당 계좌가 나타나지 않지만, 원상회복시키면 다시 인터넷뱅킹이 가능하다. 신한·국민·우리은행 등에서 이 서비스를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의 인터넷뱅킹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이 숨김계좌 메뉴를 눌렀을 경우 감춰놓은 계좌가 발각될 수 있다는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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