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⑭ 민간 주도 첫 금융 사 한국개발금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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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1967년 4월 출범한 한국개발금융은 국제금융공사와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가 공동으로 설립한 국내 최초의 민간 금융회사였다. 1968년 2월 김진형(맨 오른쪽) 한국개발금융 사장과 김동조(맨 왼쪽) 주미 대사가 국제금융공사와 제1차 차관 도입 융자약정을 체결하고 있다.


“세계은행 산하기관인 국제금융공사가 한국 민간 경제계와 개발금융회사를 설립했으면 하는데 한국경제인협회의 의향은 어떠한지요?”

 1965년 12월 세계은행 산하 국제개발협회 연례조사단으로 방한한 굴하티 박사 일행이 한국경제인협회를 방문해 회의하던 중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렇게 간절하게 정성을 들여온 개발금융회사 설립이라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4년째 추진 중이었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경제체질을 자립경제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지만 돈이 없어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하든 세계은행에서 장기저리 자금을 좀 빌려올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유엔기구인 세계은행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6월 정식 출범했다. 초창기 세계은행은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정부를 상대로 돈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독재정부가 많다 보니 오히려 독재를 강화해주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에 직접 자금을 지원키로 정책을 바꾸고 국제금융공사를 설립했다. 국제금융공사가 민간과 합작으로 개발금융회사를 설립한 뒤 그곳을 통해 민간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우리와 같은 후진국의 공업화와 경제개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개발금융회사였다.

 굴하티 박사는 우리나라 민간에서 참여할 만한 능력이 있는 곳은 경제인협회라고 보고 우리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협회는 즉각 회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개발금융회사 설립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동원한다는 데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협회는 66년 6월 9일 임시총회를 소집하고 ‘개발금융회사 설립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경제인협회 회장에 오른 홍재선씨가 위원장을 맡고 김진형 전 한국은행 총재가 상근 부위원장으로서 출근을 시작했다. 조사부에서 금융부문을 담당해온 나는 준비위 실무책임자로 임명됐다.

 이후 개발금융회사 설립 문제를 놓고 보다 구체적인 실무조사에 착수하기 위해 카이퍼 단장을 필두로 한 국제금융공사 조사단이 방한했다.

 막상 합작 금융회사를 세우려니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가 기업지배구조였다. 조사단은 가급적 많은 주주대표를 이사회에 참여시키고자 했다. 그래야 국제금융공사와 함께 투자할 외국인 투자자들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국내 주식회사는 일상의 업무를 집행하는 상근이사들로만 이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조사단은 고심 끝에 상법상의 이사회에는 국내외 주주대표가 지분율에 따라 사외이사 형태로 참여하고 집행이사 중에선 대표이사만 참여하되 일상의 업무 집행을 위해 별도로 상임위원회를 두는 방안을 찾아냈다. 상임위원회는 이사회의장, 대표이사, 국내외 주주대표 2명 등 모두 4명으로 구성해 이사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그 범위 내에서 경영에 필요한 의사를 결정토록 했다. 다른 주식회사와 비교하면 이사회가 소규모 주주총회의 역할을, 상임위원회가 이사회의 역할을 함으로써 주주가 경영에 참여하는 동시에 경영진을 감시토록 해 주주 중시 경영과 투명경영을 실현할 수 있도록 했다. 집행임원 제도도 이때 새롭게 도입됐는데 주주대표가 이사회에 참여하는 점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대표이사 사장의 지위권한을 강화하고 집행임원에게 고유 업무를 맡겨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두 달 가까이 함께 일한 외국인 실사조사단은 경영을 맡을 인물의 능력과 인품까지 세밀하게 조사했다. 조사단이 방한하기 전에 국제금융공사는 니시하라 극동대표를 파견해 개발금융회사를 믿고 맡길 만한 후보자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조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카이퍼 단장은 한국을 떠나면서 “국제금융공사는 한국경제인협회가 중심이 된 민간투자자들과 합작으로 개발금융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한 협의와 연락은 김진형씨를 통해서 한다”고 발표했다.

 조사단이 고심해 만든 지배구조 방식은 훗날 한국개발금융의 이사회 제도에 그대로 채택됐다. 사외이사가 경영에 참여하는 지배구조는 30년 뒤인 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시행된 뒤에야 비로소 우리나라에 보편화됐다. 한국개발금융의 지배구조는 한 세대를 앞서갔던 셈이다. 주주대표가 주축이 된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구성은 이후 하나은행에까지 이어져 자율적인 기업문화를 만들어냈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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