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경의 행복한 책읽기] '마르셀 프루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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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저녁, 마른 먼지 냄새가 나는 싸늘한 바람이 한줄기 코끝을 스쳐갈 때, 혹은 어두워지는 청동빛 하늘 속으로 검은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겨울 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시간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아득한 기억의 한 자락이 문득 우리의 마음 속에서 소리없이 펄럭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아주 짧은 순간 우리의 마음을 스치고 사라지는 과거형의 문장들, 그 덧없이 스쳐가는 시간의 둥지는 어디일까?

문학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벌이는 싸움, 혹은 소멸해가는 시간 속에 마음의 둥지를 트는 일일 것이다.

시간의 심연 속에 부유하는 기억의 조각들을 언어라는 화석 안에 새겨두려는 욕망, 아마도 그것은 인간에게 부여된 물리적인 시간의 운명을 뛰어넘으려는 불멸의 욕망일 것이다.

시간, 혹은 기억의 대서사시라고 할 만한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장 이브 타디에 지음.하태환 옮김.책세상)
는 인간이 시간의 물리적 흐름 앞에서 얼마나 나약하게 부서지는 헛된 존재인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정신적 노력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시간 속에 소멸해가는 생의 헛됨을 기억의 이름으로 복원해내려는 이러한 노력은 아마도 생전의 마르셀 프루스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천식발작, 그리고 죽음 직전까지 프루스트를 사로잡았던 죽음의 공포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는 사교계 주변을 들락거리는 귀족적 취향 때문에 속물이라는 비난의 표적이 되는가 하면, 평생 어머니에 대한 심리적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정다감하고 섬세한, 그러나 병약하고 소심했던 예술가로서 살았다.

겉보기에 프루스트의 생애는 세속적이고 단조로운 삶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가득 채우고 있는 섬세한 영혼의 떨림, 인간과 사물에 민감하게 감응하는 내밀하고 풍부한 감각, 끊임없는 욕망의 질곡으로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드라마는 프루스트가 그의 심약한 내면을 짓눌렀던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깊고 풍요한 내적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

프루스트에게 죽음의 운명과 대치하고 있었던 그 내면의 드라마는 문학 아닌 다른 무엇으로 형상화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프루스트 생전의 온갖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사실들까지 끌어모아 프루스트의 생애를 '지나치게'방대하게 복원해내려는 이 책의 야심찬 시도는 부질없는 호사 취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프루스트의 진정한 삶은 그의 문학 안에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박혜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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