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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도덕기준은 위선을 낳고 금기는 권력을 낳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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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호 32면

한국인은 철학이라면 우선 난해한 학문으로 여긴다. 요즘엔 ‘문·사·철·시·서·화’가 한 묶음으로 버림받는 대신 정체불명의 효율성 교육이란 게 판을 치면서 우리 아이들을 경쟁시장으로 내몬다. 전인교육과는 거리가 먼 ‘싸움닭’ 양성이다. 우리 중등교육 과정에는 철학이 보이지 않으나 유럽에서는 초등교육부터 철학을 가르친다. 철학은 모든 사고의 기본이며, 다양한 사고를 통해 창의성을 배양시킨다는 오랜 교육전통에 따라서다. 특히 프랑스에선 철학이 대입 수능시험인 ‘바칼로레아’ 과목 중 으뜸가는 비중을 차지한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전통철학에 반기 든 ‘해체철학’ 자크 데리다

20세기 철학자 중 많은 화제를 뿌린 인물이 바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년·사진)다. 데리다는 한국에도 얼마간 알려져 있으며 저서 중 일부는 번역돼 출간된 것도 있다. 데리다는 1930년 알제리 수도 알제 교외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세파라디 유대인이다. 유대인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유럽(특히 동유럽)계 백인 혼혈인 아시케나지(Ashkenazi), 다른 하나는 지중해, 중동 지역 셈족 계열의 세파라디다. 전 세계 유대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아시케나지는 주로 미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소수의 세파라디는 이스라엘·프랑스에 많이 산다. 프랑스에 세파라디가 많은 이유는 60년대 초 북아프리카 알제리·모로코·튀니지 등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면서 이 지역 세파라디가 프랑스 본토로 많이 이주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현대 철학자”

소년 시절 데리다는 당시 알제리에도 파급된 반유대주의로 인해 학교를 여러 차례 옮겨야 하는 수난을 당했다. 스포츠를 좋아하던 그는 한때 프로축구선수를 꿈꾸었으나 철학·문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생각을 바꾼다. 49년에는 파리로 이주한다. 프랑스 양대 명문고교 중 하나인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후일 이념적 지기가 되는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만나 의기투합한다. 52년엔 프랑스의 3대 명문 영재교육기관 중 가장 명성이 높은 에콜 노르말(ENS:고등사범대)에 진학한다. 그는 공산주의 성향이 아닌 극좌파 학생서클에도 가입한다. 57년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지만 이미 프랑스 주류 철학계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그에게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미국 하버드대의 조교 겸 강사로 취업해 자신의 학위논문 주제인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강의한다.

59년 프랑스에 돌아온 데리다는 지방고교 교사와 소르본대 강사직을 전전하면서 자신의 혁신적 학설인 ‘해체철학’(D<00E9>construction)의 골격을 완성한다. 그의 학문세계는 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틴 하이데거, 앙리 베르그송 같은 철학자로부터, 그리고 문화예술 분야는 현대음악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로부터 각각 영향을 받았다. 64년에는 드디어 모교인 에콜 노르말의 교수로 자리를 옮겨 이후 20년간 재직한다. 70년대에는 존스홉킨스·예일 등 미국 명문대학의 초빙교수로 활동한다. 프랑스보다는 미국에서 더 환영받은 그의 학설은 점차 프랑스로 역수입되고 프랑스 학계에서도 자리를 잡는다. 83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국제철학대학을 설립한 뒤 그를 학장 자리에 앉힌다.

나는 90년대 초반 파리에서 근무할 때 프랑스인 친구 철학교수의 권유로 데리다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달변인 그는 난해한 논리를 쉽게 풀어 이해시키려는 열정을 보였다. 대석학의 권위적인 카리스마는 없었고 길에 다니면서 누구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하고 소탈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동성애 등 성 소수자 권익에도 관심
데리다의 간판학설인 ‘해체철학’은 플라톤에서 시작해 장 자크 루소와 레비 스트로스를 거쳐 확립된 서양 지성세계를 분해해 전통철학의 명료성과 일관성 개념을 수정하는 것이다. 그는 특히 육체보다 정신, 문자언어(Ecriture)보다 음성언어 중심의 서양 형이상학체제의 해체를 주장했다. 그는 위선과 금기에 대해서도 반감을 보였다. 범상한 인간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높은 도덕적 기준은 결국 위선으로 흐르게 되며, 아픈 자에 대한 배려라는 명목으로 묶어놓은 사회적 금기는 배타적 권력으로 발전한다는 논리다. 그는 이 두 가지를 해악으로 규정하며 종교를 그 주요 행위자로 지목했다. 동성애자 등 성 소수자의 권익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데리다는 2003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치료하다 암이 급속하게 퍼져 2004년 10월 파리의 한 병원에서 74세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그에게 “프랑스가 배출한 지구상 가장 위대한 현대철학자 중 한 명”이라는 극찬의 조사를 바쳤다. 그가 남긴 저서는 80여 권에 이른다.

지난 3월 한 재미 한국 여류 사진작가는 매우 이색적인 퍼포먼스를 벌였다. 미국 미주리주 한 돼지농장에서 6시간 동안 나체로 수백 마리의 돼지와 함께 엎드려 있는 셀프누드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녀는 과거에도 몇 차례 유사한 행위예술 이벤트를 열어 미국 유력지에서 호평을 받곤 했다. 상당수 매체는 사진과 함께 이를 크게 보도했다. 한 신문은 개별 인터뷰 기사도 실었다. 미국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는 이 여성은 이 퍼포먼스의 발상을 2006년 출간된 데리다의 유작 ‘동물, 고로 나는 존재한다(L’animal que donc je suis)’에서 얻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지금은 저세상에서 쉬고 있을 데리다가 만약 이 말을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답했을까.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지 싶다. ‘글쎄, 그 말은 그런 것에 쓰라는 것은 아닌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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